그러나 나는 암 말기 투병을 하였어도 한 번도 암으로 인해 세상과 이별한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심한 하혈로 기저귀를 차고, 배두랭이를 하고도 해외여행 27개국을 잘난 척 어깨를 으쓱대며 고개를 들고 짧은 외국어 실력으로 구경과 감상과 공부를 하러 지구촌 곳곳을 누볐다.
별로 쓸 데도 없는 문협, PEN(원로) 회원증을 내 보이고 명함을 돌리면 어쩌다 복잡한 개미굴 공항 입출입국장을 공항 직원의 특별 안내로 출입이 가능했다. 암 환자이자 늙은 무명 3류 저널리스트도 가끔 글쟁이 대접을 받을 때도 있었으며 스케줄을 잘못 잡아 즉석 가이드를 앞세우고 비를 맞으며 아내의 손을 잡고 뜀박질을 하였는가 하면, 공항에서 손에 들고 내려야 할 여권을 짐 속에 깊숙이 넣고 입출입국장을 나서다 진땀을 흘리기도 하고 구경을 너무 열심히 하는 호기심이 충만하여 다른 관광객들의 사진 모델이 되고 신분 등재 모델이 되기도 하였는가 하면 서투른 해설사 노릇의 못난이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나는 암 따위의 병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마은 속 다집을 하고 투병의 강도를 높이고 글 쓰는 일로 투병의 구실을 삼았다. 독자들의 격려와 따스한 말, 그리고 제자들의 눈물이 오늘의 건강한 나를 있게 하였다.
친척이나 친지 중 몇 사람은 ‘암 3년 생존 한계설’, “암에 걸려 어찌 살 수 있으려고?”라는 말을 내 앞에서 떠드는 사람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한 입원방의 환우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미스터 강원도, 조선소 기술자, 어촌 선장, 대기업 임원, 모 신문 사장 등…. 그들이 돈이 없고 명의가 없어 타계한 것이 아니었다. 나 같이 의사의 지시나 약사, 간호사의 지시를 하느님 말씀같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험용 투약도 복용하고그토록 즐기던 것을 금주, 금연하고는 하도 억울하고 술, 담배와의 이별이 슬퍼 수락산 눈물봉 암바위를 주먹으로 피가 나도록 두드리며 통곡을 하면서 살았다.
세 권의 책(수필집1, 동화책2)을 내어 암사망설의 진원지를 차단하고 무료로 1천부를 찍어 전국에다 뿌리고는 내 마을 ‘마들이야기’를 구청(문화원)기금으로 발간, 무료배포(1천부)하였다. 그게 약이 되었다. 주치의는 암 선고 5기(6기는 사망) 환자인 나를 살려 명의 상패를 받기도 했다. “3류 글쟁이도 입김이 뜨겁고 피를 찍어 글을 쓸 수 있으면 절대 안 죽는다”는 신화를 남긴 셈이다.
‘완치 판정’이 의사 입에서 내려지던 날, 내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는 ‘천사의 나팔(엔젤 트럼펫)’ 꽃 18송이가 활짝 피었다. 그리고 고향 포천에서 날아온 듯 황조롱이 한 쌍이 녹지대를 가로질러 포물선을 그리고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