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대통령이나 고위공직자들 한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뉴라이트나 극우파는 조직이 세고 학벌과 재력이 있다. 관직에도 뿌리 박혀 있고, 심지어 언론도 장악하고 있다. 지금은 엎드려 있지만, 언젠가 그들이 다시 나올지 모른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들이 건국절을 다시 들고 나오지 못하도록 올바른 역사를 제도적 법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가 나라를 읽고 36년간 국민들이 고생하면서 나라를 되찾았는데 어떻게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주장을 버젓이 하나”라고 하셨다.
국가와 민족을 살리시려고 풍찬노숙하시며 만주벌판을 누비시던 94세이신 광복군출신의 선배님의 말씀에 후배로서 크게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발행인 주.
ⓒ 포천신문
상하이에서 반년이 넘는 기간동안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어수선하며 혼란스러웠지만 정이 들었던 상하이를 뒤로하고 떠난 것은 1946년 3월 초였다. 미해군 L.S.T(상륙용 함정)편으로 황포강을 따라 내려갔다. 나는 갑판으로 올라가 멀어져 가는 상하이를 뒤돌아보면서 그 동안 잃었던 국권을 회복코자 투쟁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악조건 하에서도 지원해 준 중국과 중국 국민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중국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양자강 본류를 거쳐 황해로 들어 선 함정 선상에서 고국 쪽 수평선을 바라보며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궁한 발전을 이룩할 조국의 앞날의 모습을 그리며 꼭 그 꿈이 이루어지길 기원했다.
다음날 오후, 드디어 그리던 고국의 산천 부산 항구의 오륙도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부두에 하선해서는 한시도 잊지 못했던 조국 땅에 입 맞췄다. 3년만에 돌아온 내 고국땅 흙냄새가 고향 영평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열차로 부산을 떠났다. 차창은 깨어져 바람이 휘몰아치고, 전기 꺼진 암흑의 차내에서는 촛불로 어둠을 밝혔다. 같이 귀국한 광복군 동지들과 고국에 돌아온 기쁨과 흥분으로 잠을 못 이루면서, 중국에서의 항일투쟁 후일담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서울역에 도착한 우리들은 승강장의 간이 수도시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역전으로 나갔다. 목숨을 건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으로서의 대일 항쟁, 사선을 넘나 든 지난 일들이 주마등같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기쁨으로 들떠있었다. 같은 날 입대하고 같이 일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한 강화의 신의철, 고양 일산의 김권, 그리고 입대는 같이 했으나 타부대에서 탈출한 개성의 이희화와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서로의 건강과 앞날의 행운을 빌면서 서로 소식을 전하기로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러나 국내의 혼란한 정세와 6.25 전쟁 등으로 우리들이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나는 서둘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에 있는 옛 집을 찾았다. 광복 후 해가 바뀌었는 데도 소식이 없어 크게 걱정하고 있던 가족들과의 재회는 너무나 감격스러웠고 기뻤다. 상하이에 있을 때 임시정부 귀국편에 내 소식을 적은 서신을 고향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주소를 서울아닌 고향 영평으로 적어서(전시소개로 서울집은 고향 영평으로 소개 한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편지는 38선 이북인 영평으로 배달되지 못하여 소식도 모르고 계셨다. 고향에 계신 증조부님과 조부모님도 빨리 찾아 뵈야겠다. 나는 서둘러 포천 영평으로 향했으나 국도로의 귀향은 38선에 막혀 어려워 포천읍 뒷산 ‘무러고개’를 넘어 이면 도로를 이용해 도보로 고향을 찾았다. 남대천(영평천)에 이르러 그리운 고향마을을 바라보니 불무산 아래 영평의 낯익은 현대식 건물의 금융 조합 첨탑이 눈에 들어 왔다. 반가웠다. 그러나 주변 분위기는 이상했다. 그 옛날 활기찼던 영평 시내는 조용했고, 어렸을 때 흔히 봤던 빨래하던 아낙에 모습이나 견지 낚시하는 남성네들도 눈에 띄지 않았고, 개구쟁이들의 물놀이 풍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 건너 고향집을 찾아 증조부님, 조부모님께 무사 귀국 인사를 드리니, 내가 일본군을 탈출한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 지인의 자제인 면서기로부터 극비라면서 전해 들었다고 하셨다. 내가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사실을 수만리 떨어진 고향으로까지 수소문해 처벌코자 한 일본군의 정보 조직 행정력에 새삼 놀랐다. 포천 경찰서에서도 형사가 찾아 와 손자의 행방을 추궁하더란다. 일본의 조직적 행정력과 정보력이 놀라웠다. 내가 수많은 사선을 돌파하고 무사 귀국한 것은 오로지 하느님(토속적 신앙의)과 조상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하고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나, 조모님의 절실한 손자 무사 귀환 기도로 매일 정안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간절히 빌으셨던 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