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광복절을 3일 앞둔 8월 1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독립유공자 및 유족과의 오찬 행사가 열렸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서 " 건국절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직언을 한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은 자랑스러운 영평출신 선배님이신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님이시다. 1948년 건국론을 지지하던 정권과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직격탄이었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지 어떻게 건국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민족정기가 살아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절로 해야 함이 만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님을 선배님으로 모실 수 있음을 포천시민으로서 큰 영예와 자랑으로 생각하며 포천신문에 선배님의 옥고를 실를 수 있음을 크게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발행인 주.
ⓒ 포천신문
얼마나 내려갔을까. 둔탁한 발사음에 이어 배 주변으로 떨어지는 포탄의 파열음이 귀를 찔렀다. 박격포 포탄인 것 같았다. 이어서 기관총 소총의 발사음이 박격포 포탄 파열음과 뒤섞여 요란하게 들려오면서 뱃사공의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염려했던 신사군(공산군)의 매복 공격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총, 포탄을 피해 오른쪽 뚝 밑으로 피신, 접안한 배 안으로 군인들이 들이 닥쳤다. 공산군인 신사군이었다. 무기를 내놓으란다. 갖고 있던 권총을 몰수당하고 우리들은 그들의 지시대로 하선하여 뚝으로 기어 올라갔다. 저 멀리 마을 쪽에서는 국부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밑에서 신사군 지휘관이 유탄이 위험하니 빨리 뚝 밑으로 피신하라고 소리친다. 우리는 뚝 밑으로 달려 내려갔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여기서 개죽음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휘관이 오더니 “당신들은 그대로 목적지로 가시오” 한다. 좌불안석하던 우리들은 급히 자리를 떠 배로 달려가 위험지구에서의 탈출을 재촉했다. 출발하는 배 안에서 밖을 돌아보니, 그 많던 배들은 다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고, 세네 척만 우리와 같이 떠나고 있었다. 매복하고 있던 신사군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 요원들을 살해하거나 납치하고 국부군을 격퇴한 것이다. 어렵게 호구를 벗어났다. 일부 중국 국민들은 파벌과 부패로 얼룩졌던 장개석 국민당 정부보다 정치적으로 기강 확립과 대민 포용책을 추친한 공산당군을 친밀하게 생각하여 각종 정보를 제공하거나 협조했던 당시였다. 국공 합작으로 대일전에 임했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군과 모택동의 공산군은 일본의 패망을 계기로 다시 분열하면서 세력 확장의 내전으로 확전하는 정세였는데 이번의 기습 공격도 그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패망으로 미래를 꿈꾸며 앞날을 기약하던 우리로서는 중국의 정세 변화에 크게 영향 받을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 이번 사건을 겪으니 걱정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몰려오는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했다. 우후와 난징을 거치며 임무를 수행한 후 상하이에 도착 한 것은 10월 초순경이었다. 역전 광장에서 교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숙소인 일본인이 경영했던 상하이의 명물 가든 브리지 부근에 있는 만세관 호텔로 이동했다. 고향집을 떠난 후 처음 맞이한 제대로 된 건물과 시설에서 유숙하니 도리어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여기 상하이는 금융 상업의 국제적 중심 도시로써 제법 활기를 띠고 있었으나 정세의 급변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각지에 흩어져 있다가 전후 이곳으로 모여 든 수많은 우리 교포들과 해체된 일본군에서 빠져 나온 많은 한국 장병들의 집결, 그리고 전후의 사회불안과 겹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 간의 정치적 암투는 이곳에서도 치열했고, 우리 교민 사회도 이념이나 일본군 하에서의 전력 문제 등으로 상호 불신 풍조마저 만연되어 혼란스럽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일부 한국 사람들의 현지에서 한 친일 행각은 중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게 했다. 중국 사람들은 일본인을 ‘꾸이즈’라고 욕했는데 일본에 협력한 일부 한국 사람은 ‘샤오 꾸이즈’라며 멸시하고 더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며 비하하기도 했다. 물론 일부였지만 친일 한국인을 멸시한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상하이를 뒤로하고 국난 시 국권의 회복을 위해 투쟁했던 임시정부 요원들은 국내 정치적 사정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1월 23일 환국했다. 군정이 실시된 국내에서는 38선이 고착화되고, 미국과 소련 간의 한국 신학 통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하이 교민 사회는 더욱 어수선하고 불안하며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교민들은 신탁 통치 반대 시위까지 하며 이에 항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규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자 임시정부 국군이었던 한국 광복군도 실질적으로 해산하기 시작했고, 공식적으로는 1946년 5월 16일 복원을 선언했다. 8.15 광복으로 가졌던 기쁨과 희망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더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