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로 포천에 거주하였던 인물이다. 양천 허씨로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다. 서경덕의 문인(제자)으로 사암 박순과 동문 수학하였으나 당 맥이 달랐다. 명종 1년(1546년) 식 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수재로 명종 6년(1551년) 부교리를 시작으로 명종 8년 사가 독서의 은전을 입은 인물이다.
박계원과 함께 왕의 명령을 받고 옥취정에 들어가 율시로 화답하여 이름을 떨친 시인이었다. 동인의 우두머리로 박순과 대립하였으며 서인과 극심한 대립을 하였다. 과격한 언쟁으로 바른 소리를 한 강직한 인물이다.
선조 1년(1568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또, 향약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에 보직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동지중추부에 임명되었다. 상주에서 재직 중 사망하였다. 동인의 거두로 303년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항상 청렴결백한 청백리였다.
또, 지금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지방 의회제도 보다도 더 백성들과 밀접한 민주 자치제도라고 할 수 있는 ‘향약’제도를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허엽 대감(중종 12년(1517년)~선조 13년(1508년))이 얼마나 고향의 자치제도를 원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허균’이나 ‘허난설헌’ 같은 우리 조선조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천재적인 문학자(소설가, 시인)를 아들, 딸로 길러 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 자신이 혁명을 통해 폐쇄된 정국을 바로 잡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홍길동전’을 쓰게 된 동기와 성격도 아버지 ‘허엽’의 과격한 혁명의 성격과 투쟁 의식에 힘입은 바 아닌가 생각된다. ‘허난설헌’과 같은 조선조 여류시인을 탄생케 한 바도 아버지 ‘허엽’대감의 예술혼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는 점은 주지해 마지않은 사실이다.
문장에 능한 허엽 대감은 ‘경민편’을 보완, 출판하여 목민관의 교과서를 삼았으며 ‘삼강오륜행실’ 즉, 유교의 기본 진리이며 백성들의 생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편찬함에 참여하였다는 점도 허엽 대감의 목민관의 고리를 다하고자 하는 바였으리라. 자신의 수필집으로 ‘초당집’, ‘전언왕행록’ 등이 있어 대감의 인간적인 여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재미가 있다.
포천의 양천 허씨 후손으로는 8.15 해방 이후, 연희 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학교 교수였던 한국 최초의 수학교과서를 집필한(허만학의 수학) 허만학씨와 아들 허천(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수석 입학 및 졸업, 하버드대 전자공학박사 및 교수, 28세)씨와 양천 허씨 중앙종친회 사무총장 허종무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