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때로는 이를 혼동(混同)하기도 한다. 헷갈리기도 한다. 사실은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고 진실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을 말하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사실은 팩트(fact)이고 진실을 투르쓰(truth)이다. 팩트의 반대는 픽션(fiction)이다. 소설(小說)이다. 픽션이란 허구(虛構)를 말하는 것이다.
허구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얽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투르쓰의 반대는 훨쓰(false)이다. 거짓이란 말이다. 가짜라는 말이다. 진짜가 아니라는 말이다. 참됨이 아니란 말이다. 사실과 진실은 이처럼 다른 것이다.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을 진실로 규명(糾明)해나가는 것이 바로 저널리즘(journalism)이다. 저널리즘이 하는 일이다. 기자(記者)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사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사실의 이면(裏面)을 쫓는다. 추적(追跡)한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가를 추적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주장(主張)을 하는가를 파헤친다. 그 속에 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기자 아니, 저널리스트(journalist)들은 이처럼 행동의 세계와 전문가의 세계와 일반 대중을 연결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자 소명(召命)이다.
사실의 언어(言語)와 신념(信念)의 언어란 말이 있다. 사실의 언어는 현재(現在) 진행형이나 신념의 언어는 과거(過去)지향적이다. 과거의 경험(經驗)이나 과거의 기억(記憶)이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리 말하는 것이다. 팩트를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偏見)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리 말하는 것이다. 사실을 뛰어넘어 신념을 바탕으로 말하면 진실은 더욱 멀어진다. 왜곡(歪曲)되기 때문이다. 물들여지기 때문이다. 착색(着色)되기 때문이다. 프레임frame)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목(眼目)으로만 세상을 보고 진영논리(陣營論理)의 잣대로만 판단(判斷)하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신념의 언어가 넘치고 사실의 언어가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신념의 언어는 사실의 한쪽만 보는 데서 시작된다. 한쪽 사실만 보면서 신념을 쌓게 되면 다른 쪽은 아예 보고 싶지 않게 된다. 나아가 다른 쪽 사실 앞에 분노가 치미는 감정적(感情的) 단계까지 가게 되면 신념의 언어는 파괴성(破壞性)을 드러낸다.
반면 사실의 언어는 견고(堅固)하다. 누가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엄연한 현실에서 사실의 언어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팩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팩트가 진실은 아니다. 수사(修辭)로 포장(包裝)되고 분식(扮飾)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그리고 행간(行間)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 인텐션(intention)을 들여다봐야 한다.
사실을 이야기한 것일지라도 그 의도(意圖)가 무엇인지 가름해봐야 한다. 같은 말이라도 의미(meaning)가 다르고 해석(interpretation)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念頭)에 둬야 한다. 상식의 언어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상식선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결(祕訣)은 간단하다.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가? 일관성(一貫性)이 있는가? 예측가능한가?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 해도 진실이 아니면, 참이 아니면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목지신(徙木之信)’이란 말이 있다. 믿음을 주려면 식언(食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진(秦)나라 상앙(商鞅)이 백성의 불신(不信)을 타개하려 길이가 세 길 정도 되는 나무를 도성의 남문에 세우고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돈을 주겠다고 공포했다.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며 나무를 옮기자 상앙은 즉시 그에게 돈을 주었다. 위정자는 약속을 지킴으로써 믿음을 줘야 한다는 사목지신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명심(銘心)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