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 말씀 가운데 화이부동(和而不同)과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화(和)는 의미요소인 口(구)와 발음요소인 禾(화)가 더해진 글자로 ‘화목한 기색’의 뜻이다. 그리고 화합(和合)은 ‘화목하게 합함’이란 뜻이다.
부(不)는 꽃밭침의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 본뜻은 ‘꽃 암술의 씨방’인데 이후 가차(假借)되어 부정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불신(不信)은 ‘믿지 아니하다’의 뜻을 말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남과 사이좋게 지내지만 무턱대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과 화목(和睦)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자신의 주장(主張)을 굽혀서까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 화합과 부화뇌동(附和雷同)의 차이를 살펴본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공자의 말은 간단하지만 곱씹어보면 볼수록 중요한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和)’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을 중시하는 것이다. 음식에 비유한다면 비빔밥에 어울린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비비되 하나의 맛으로 음미(吟味)된다. 그렇다고 그 나물의 특성(特性)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 특성을 유지하면서 비빔밥이라는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同)’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이해관계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는 양태를 가리킨다.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는 쇠처럼 단단하게 뭉쳤다가도 이해관계가 흩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흩어진다. 음식에 비유하면 비린내를 잡지 못하고 짠맛이 강한 장 요리에 견줄 수 있다.
한 입 먹어보고는 비위가 상해 탁 내뱉는 형국이다. 결말은 이렇다. ‘화이부동’은 서로 생각이 다르므로 윽박지르듯 같아지기를 요구하지 않고, 설득과 대화로 천천히 공통분모를 찾아가지만 ‘동이불화’는 같아야 한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조그만 차이도 불편해하며 편을 가른다는 것이다. 진영논리(陣營論理)에 빠진다는 것이다.
요즘 적폐(積弊)라는 말이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다. 적폐란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弊端)을 말하는 것이다. 폐단이란 어떤 일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옳지 못한 경향이나 새로운 현상(現狀)을 말하는 것이다. 잘못된 나쁜 단초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적폐는 청산(淸算)되어야 한다. 말끔히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동이불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영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편가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단 편가르기가 되고 나면 상대편에서 승복(承服)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이부동’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윽박지르지 말고 설득과 대화로 승화(昇華)시켜나가라는 것이다.
적폐청산이 지나치게 힘을 쓰다보면 또 다른 적폐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중용지도(中庸之道)를 말하는 것이다. 중용은 중정(中正)을 지키려는 우리의 몸부림을 말하는 것이다. 중정은 자연의 잣대요, 중용은 인간의 잣대이다. 청산이 지나치면 진영 논리를 강요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상대를 대화가 아니라 부정의 대상으로 간주(看做)하게 된다. 이때 적폐는 탄압(彈壓)과 희생의 논리를 펼치며 부활을 시도하게 되고 통합은 불가능해진다. 반면 화이부동에 따라 진행되면 적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역설적(逆說的)으로 많은 사람의 동의와 관심을 받지 못해 점점 고립돼 가게 된다.
사실왜곡(事實歪曲)이란 말도 있고 진실왜곡(眞實歪曲)이란 말도 있다. 왜곡이란 사실과 다르게 곱새긴다는 뜻이다.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하는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왜곡하면 판단(判斷)을 그르칠 수 있다.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의 경우엔 치명적(致命的)일 수 있다. 어찌해야 하는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잣대로 가름해야 한다. 언행일치를 보일 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