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들의 언어생활을 조금이나마 선도하고자 하는 취지로 '훈민정음놀이'라는 것을 종종 국어수업 중에 시행하곤 한다. 이 놀이의 규칙은 수업 중에 외국어나 비속어를 사용하면 벌금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벌금이 어느 정도 모이면, 학생들과 떡볶이를 먹거나 자장면을 먹기도 한다. 물론 나의 정말 큰 목적은 외국어 사용을 막는 것보다 비속어를 봉쇄하는 데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학생이 "시험을 개 잘 봤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건 잘못된 표현이니, 벌금을 내라고 했다. 근데, 충격적인 말이 학생의 입에서 나왔다.
"선생님 텔레비전에 보니까, '개'는 정도가 심한을 나타내는 접두사로서 표준어라고 하던데요?" "……!" 나는 구체적으로 그 방송사와 프로그램을 알아내어 그 학생이 말한 장면을 휴대전화 사진기로 찍고, 다시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 방송의 내용은 이러하다. /'개리'라는 출연자가 온천에 가면?/을 4글자로 답하는 문제를 맞추는 것인데, 그 중에 한 출연자가 '개뜨겁다!'라고 답을 말하게 되고, 그때 자막으로 나온 내용이 /'개'라는 접두사가 정도가 심한을 나타내는 의미로서, 우리방송과 답을 한 출연자는 방송심의규정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방송을 본 학생은 앞에 '개'를 붙인 표현이 따라서 올바른 표현이라는 주장이었다. 순간 학생들의 입에서는 줄줄이 '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개좋아요/개싫어요/개멋있어요/개재밌어요/개짜증나요/개망했어요/개잘생겼어요/개이뻐요' 등등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욕을 할 때만 쓰던 '개'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등장했다.
개:「접사」 「1」((일부 명사 앞에 붙어))'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2」((일부 명사 앞에 붙어))'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3」((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명시한 단어 앞에 쓰이는 '개'에 대한 설명이다. 이 가운데 그 방송사가 설명한 것은 바로 「3」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방송사는 결정적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부분이다.
'개망나니/개소리/개자식/개판' 등의 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예들이다. 그러나 긍정이나 부정이나, 형용사나 부사나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개'는 표준어도 아니요, 순화되어야 할 말들인 것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러한 실수를 방송사가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요, 우리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이를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따라서 사과발표도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언어 산책로는 그야말로 '개'판이 되고 있다. 비속어에 등장하던 말들이 이제는 정상적인 어휘들 속에도 침투하여, 아름다운 표현들을 오염시키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 잠시 머물고 가는 유행어가 아니라, 정말로 정서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방송에 출연하여 버젓이 그런 표현을 쓰고, 그것도 모자라 방송사에서 지원 자막까지 내 보내는 이러한 언어현실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