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즐오르다에 온 지 세달 반이 되어간다. 이제 시내의 웬만한 곳들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익숙해지니 낯선 느낌이 어느 정도 가져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5월이 되자 오랫동안 추위 때문에 방치해두었던 공원의 벤치를 밝은 페인트로 도색을 하고 나니 도시가 새 옷을 입은 듯 산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라 도로에 서있던 가로수들도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작은 리본 같은 잎사귀를 일제히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잿빛 도시가 녹색으로 채색되어가는 모습이 답답했던 가슴을 열어주어 우울했던 마음이 상쾌해져 이리저리 봄나들이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크즐오르다에서 나름대로 봄축제가 열기를 더해감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마음 속 깊은 밑바닥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느껴진다. 새로운 것을 찾아 마치 구원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라도 된 듯 기세등등한 설레임 속에 여기 크즐오르다에 오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난 여기에 와서 과거의 삶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자신에게 익숙한 이미지들만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필자는 무엇보다 나이 탓인지 새로운 것을 찾고 그것에 적응하면서 즐길 수 있는 도전의식이 자꾸 줄어드는 것이 아쉽다. 우선 소통의 측면에서 무엇보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영어보다 러시아를 오래 사용하고 선호하는지라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오직 영어소통이 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외에는 대화의 상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이 나라에서 활동하려면 카자흐스탄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 카자흐스탄은 서구나 러시아에 비해 약소국이었지만 고려인의 강제이주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기고 있다. 한국의 외교적 또는 경제적 확산을 위해서도 카자흐스탄의 언어와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필자는 크즐오르다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어떤 큰 명제도 좋지만 작은 만남과 작은 사물에 애정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기후와 환경 탓에 이 도시에서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이라든지 웅장한 것만을 찾으려고 해서는 실망하기 쉽다. 도시 어느 구석을 둘러보아도 흐드러지게 핀 꽃이나 웅장하게 멋진 건축물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이라면 눈도 거들떠보지 않을 들풀이나 들꽃조차도 너무도 반갑고 정겹게 다가온다. 그저 민들레가 피었다가 이제 바람에 날리는 하얀 홀씨 덩어리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은 절대적 미적 기준에만 집착하던 버릇에 비하면 전복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크즐오르다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다가 마음 한편에서는 인간이란 새로운 것에 대한 인식조차도 완벽하게 과거와 절연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현재의 새로움의 의미도 과거에 경험한 어떤 추억에 기대어 만들어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크즐오르다의 봄에 발견한 작은 잎새의 의미는 고국에서 황홀감에 빠졌던 꽃들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방인4」에서 “비오는 날/누군가 떨어진 꽃잎을/페북에 올렸다//만발한 라일락도 아니고/눈부신 벚꽃잔치도 아닌데/가슴이 울렁거리며/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언젠가 집 앞에서/바닥에 떨어진 라일락 꽃잎을 보면서/다가올 비극도 모르는 꽃들이/어리석다고 비웃었다//눈길도 안 주던 사소한 것들도/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 크즐오르다에서는/만개한 꽃에 입 맞추던 /그 시절이 그리워 흘리는 눈물일 수 있다//사월이 와도/좀처럼 싹을 틔우지 못해/사막의 땅 밑으로 뿌리를 내리려/사력을 다하는 낯선 도시에선/꽃잎 떨어진 길을 걷는 너를/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것이다”라고 노래하였다. 겨우내 크즐오르다의 추위에 갇혀있던 이방인은 봄이 깊어가는 이 시점에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