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부정하면 바르지 못함을 생각한다. 옳지 못함을 생각한다. 이때 부정은 뜻글자로 부정(不正)을 말하는 것이다. 또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할 때 ‘부정 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때는 뜻글자로 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그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부인(否認)한다는 뜻의 부정(否定)이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조건 부인하는 것이다. 반면 비판(批判)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이다.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따지는 것이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따지는 것이다. 오직 의(義)와 불의(不義) 그리고 선악(善惡)의 잣대만을 놓고 따지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TV에서 시국(時局)을 놓고 논객들이 열띤 논쟁(論爭)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논쟁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각각 자기의 설(說)을 주장하며 다투는 것이다. 여기서 설(說)이란 논리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논리를 놓고 다투는 것이다. 논쟁은 이처럼 서로 다른 논리(論理)를 펴는 것이고 그 논리의 적합성(適合性)을 따지는 것이다. 우열(優劣)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적합성을 따지는 것이다. 논쟁을 통해서 절대적인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답을 찾는 것이다. 미닝쉐어(meaning share)를 위해서 그리 하는 것이다. 의미공유(意味共有)를 위해서 그리 하는 것이다.
그 논쟁이 부정(否定)의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긍정(肯定)의 논쟁이 되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논란을 보면 애정을 담은 비판보다는 미움을 바탕에 깐 부정이 넘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논쟁이 부정(否定)의 논쟁이기보다는 비판(批判)의 논쟁이어야 한다. 상대를 부정하고 미워하기보다는 대화(對話)의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견을 말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물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소음(騷音)으로 들릴 뿐이다.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들릴 뿐이다.
넓고 크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절실한 것부터 챙겨야 한다. 넓고 크게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 이순간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멀리 앞을 보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긴 안목으로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부터 살펴야 한다. 안보가 우선이고 경제가 우선이다. 그것을 위해서 올인 해야 한다.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 당장의 잣대로만 세상을 보지 말고 그 시절 그 당시의 잣대로도 세상을 봐야 한다. 국난을 당했을 때 우리 선조들이 어지 했는가를 곱씹어봐야 한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지금 들어도 가슴 뭉클하지 않은가?
왜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당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누구를 탓하기 전에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하고 우리가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위대했다. 역사가 증명한다. 만리장성이 왜 생겼겠는가? 만리장성이 공격을 위한 장성인가? 방어를 위한 장성인가? 말할 것도 없이 방어를 위한 장성이다. 그렇다면 그 상대는 누구였겠는가? 그 선두에 선 민족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었다. 중원을 놓고 각축전을 벌인 것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었다. 그 기상(氣像)을 이어받아야 한다.
현 상황(狀況)에 가위 눌려서는 안 된다. 한반도는 사강(四强)의 교차점이 아니라 사강의 중심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목전의 이해득실(利害得失)만 생각할 때가 아니다. 상대를 부정하고 헐뜯는 데만 골몰해서는 안 된다. 매미를 노리는 참새 뒤에는 포수가 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우쳐야 한다. 비판하고 논쟁하되 그것이 나라를 위하고 국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아니라고 부정만해대서는 안 된다. 진정 나라를 위하는 지도자라면 앞으로 50년 아니 100년을 무엇으로 먹고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먼저 고민하고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