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포퓰리즘이란 말이 대중(大衆)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널리 퍼지고 있다. 포퓰리즘이란 대중영합주의(大衆迎合主義)를 말하는 것이다. 영합한다는 것은 비위를 맞춘다는 것이다. 상대편이나 세상 풍조(風潮)에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영합주의는 남의 뜻에만 맞추어 행동하는 원칙 없는 태도나 경향(傾向)을 뜻한다. 그렇다면 대중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대중은 유권자(有權者)를 말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투표(投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을 지칭(指稱)하는 것이다. 가리키는 것이다. 왜 포퓰리즘을 말하는가? 포퓰리즘에 매몰(埋沒)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포퓰리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포퓰리즘의 출처이고 둘은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이다. 포퓰리즘은 유권자에게서 온다. 포퓰리즘의 진원지(震源地)는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국민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의식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이다. 유권자의 선택에 따라 정치권력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유권자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다. 정치인은 그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기존의 규범이나 체제를 무시하더라도 우선은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정치(政治)는 정야(正也)라고 공자께서 말했다. 정치는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를 정(正)자를 쓴 것이다. 바르지 않으면 정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의롭지 않으면 정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에 개천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하는 것이 정치란 말도 있다. 정치의 이중적인 속성(屬性)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흐르게 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권력이 주어지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정치인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포퓰리즘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근본가치는 실종(失踪)되고 그 결과는 부머랭(boomerang)이 되어 국민에게 돌아온다.
정치인은 포퓰리즘이라는 미명(美名)하게 유권자를 아니 국민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진정한 국민행복과 나라 발전은 뒷전이다.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챙기고 당리당략(黨利黨略)을 따르는 패거리 정치에 몰두한다. 행간(行間)의 의미를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게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내세우는 복지정책에 넘어가서도 안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스위스 국민들을 보라. 그들은 나라에서 공짜로 돈을 준다는데도 반대하지 않았는가.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달콤한 공약과 복지정책이 나라의 곳간을 비우고 국력(國力)을 기울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지금은 왕조(王朝)의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비견(比肩)의 시대다. 비견이란 대중(大衆)을 말하는 것이다. 매쓰(mass)를 말하는 것이다. 국민을 말하는 것이고 유권자를 말하는 것이다. 유권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闡明)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를 수 있다. 선거하고 투표할 때만 국민이 주인이고 주권이지 끝나고 나면 그게 아니다. 반대로 지배받게 되어 있다.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대통령이 왕조시대의 제왕들처럼 권력을 몰아 쥐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분권을 말하고 이원집정제를 말한다.
군주는 배(舟)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선인들의 말이다. 통치자에 대한 경고(警告)다. 포퓰리즘에 대한 경고다. 어찌해야 하는가? 유권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무엇이 진정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후손을 위한 길인가를 명석(明晳)하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두 축이 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이고 근간(根幹)임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