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의 프랑스말에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한다. 칼레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후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된다. 그러나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칼레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한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처했던 시민 여섯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그가 속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충족될 때 지도층 인사들을 존경과 신뢰의 눈으로 바라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러한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상류 지도층 인사들의 명성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이르는 말이다. 상류 지도층 인사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바탕 위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솔선수범하여 앞장서 나감으로써 사회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등 여러 사회적 순기능이 기대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가?
부정과 부패로 얼룩덜룩한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들을 살펴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도 역사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찾을 수 있다.
우당 이회영(1867~1932)은 대대로 선비 정신을 이어 온 명문가의 자손이며 독립운동가입니다. 1896년 경기도에서 인삼 농장을 경영했으며, 그 수익금으로 항일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했다.
이회영은 독립 협회에 가입해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국권 침탈이 겉으로 드러나자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지원했습니다. 또 비밀 결사인 신민회에서 활동했으며 항일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과 독립군을 길러 내는 데 힘쓰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32년 여순 감옥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 화랑도(花郞徒)로 대표되는 신라 상류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600년 김유신의 동생 김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의 결사대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되자 아들 ‘반굴’에게 “지금이 충ㆍ효를 함께 이룰 수 있는 기회”라고 하면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우라고 했다. 이에 반굴은 용감하게 싸움에 임하여 장렬히 전사하고, 이를 본 ‘품일’은 그 아들 ‘관창’에게 반굴처럼 용감히 나가 싸우라고 했다. 관창도 전사를 했다. 두 장수의 아들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은 신라 군사들의 전투의지를 불러일으켜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경주 최씨 가문의 400년 동안 내려오는 가훈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최씨 가문의 6가지 가훈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 것(즉 권력의 한계를 가졌던 것이다).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말 것(재산도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 것.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부자이지만 젊을 때 3년 정도는 검소하게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자기집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이다. 대대손손 대를 이어 6가지 가훈을 실천한 최씨 가문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었다. 9대에 걸쳐 진사를 지낸 지식 있는 양반 부자로 정당하게 부를 축적했으며, 그 부를 사회에 적절히 환원함으로써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은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일본 총독부의 끈질긴 관직 제의도 거부했다.
외국의 경우 지성은 그리스인, 체력은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어떻게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지적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의무를 감당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사회의 본보기가 되었다. 국고가 바닥나자 전시국채를 발행하여 원로원 위원과 고위 관료, 부자들에게만 구입하도록 하였고, 지도층이 먼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쳤다. 귀족들은 스스로 자진하여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국난이 일어났을 때 솔선수범하여 전쟁터에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실제로 로마의 원로원 등 귀족들 상당수가 전쟁터에서 희생당했다고 한다.
몽고 대제국을 건설한 징키스칸은 전쟁터로 출전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네 아들을 선두에 세워 병력을 지휘토록 했으며, 그 결과 3차에 걸친 서방원정을 대승으로 장식하고 광대한 몽고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오죽하면 우리 사회지도층은 사회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지도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사회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사회지도층 집단이 형성되어 왔지만 군사정권 등을 거치면서 ‘화랑도 정신’이나 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켜왔던 ‘선비정신’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사회지도층과 그 자녀들의 행태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병역기피, 탈세, 부정입학 등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부패구조로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지도층은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 다시 말해 ‘의무를 망각한 상류집단’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구체적인 덕목은 무엇일까? 물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구체적인 덕목은 어디에도 명문화 된 바가 없지만 최근 우리 사회의 공론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대략 7가지의 덕목을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 덕목은 도덕적 의무의 이행이다. 두번째 덕목은 절제라고 한다. 세번째 양보이다. 네번째 덕목은 희생이다. 다섯번째 덕목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이다. 기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여섯번째에 있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마지막 덕목으로 사회적 책임의식을 꼽는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있고 흔히 말하는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인사들이 의무, 절제, 양보, 희생, 봉사, 기여, 책임과 같은 덕목을 이행해야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