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태를 보면서 입현무방(立賢無方)과 유재시용(惟才是用)이란 말의 뜻을 음미(吟味)해본다. 입현무방이란 인재(人才)를 등용할 때 친소(親疏)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유재시용이란 오로지 재주만을 기준으로 등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조선시대 인사정책의 지침(指針)이었다. 친소란 친함과 버성김을 말하는 것이다. 친하거나 친하지 않거나 상관없다는 것이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비롯한 숱한 실정(失政)에도 조선 왕조가 500년간 지속됐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유럽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면 이 땅 간방(艮方)에는 ‘선비문화’가 있다. 선비 정신이 바로 조선의 장수 비결이었던 것이다.
선비란 학식(學識)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학덕(學德)을 갖춘 사람을 예스럽게 그렇게 불렀다. 예학에 밝았던 조선 중기 명문장가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선비상에 대해 “온몸으로 인식하고(體認), 온몸으로 성찰하고(體察), 온몸으로 시험하고(體驗), 온몸으로 실천(體行)한다”는 사체(四體)의 정신을 강조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단순히 규범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치 판단과 윤리 지향의 성향이 오랜 기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침전(沈澱)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비정신은 仁義禮智忠孝敬信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儒敎的) 세계관이다.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우리나라는 근대 이전 기록 문화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선진국이었다. 사관(史官)들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던 실록은 권력자를 감시하는 ‘CCTV’와 다를 바 없었다. 밀실(密室) 정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첫째는 제도(制度)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가 확립돼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실행(實行)이다.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품격(品格)과 의지(意志)이다.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어도 이를 제대로 실천(實踐)에 옮기지 않으면 무영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입현무방(立賢無方)과 유재시용(惟才是用)을 중히 여긴 소이이다.
선비정신을 내면화한 대표적인 왕 세종대왕,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했던 장군 이순신,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안중근 의사,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고결한 영혼 윤동주, 동방의 공자 퇴계 이황, 목민(牧民)을 강조한 다산, 이들의 고결한 선비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면화해야 한다. 조선 중기 학자인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인해 34년간 천거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 등청(登廳)한 건 모두 합쳐도 1년이 안 되었다. 왜 그랬을까? 달콤한 꿀단지 같은 권력에 취해서 정신을 잃다 보면 말로가 비참하다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명종(明宗) 때 일이다. 강징(康澄)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 다섯 가지와 깊이 두려워해야 할 여섯 가지를 시사(時事)로 상소하여 말했다. 그 중 여섯 가지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진 선비가 몸을 감추어 숨고, 염치가 무너지고 도리가 사라지며, 상하가 서로 사적인 이익만 따르고, 비방과 칭찬이 진실을 어지럽히며, 바른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여섯 가지의 일만은 깊이 두려워할 만합니다(爲國家者, 深可畏者六, 賢士藏匿, 深可畏. 廉恥道喪, 深可畏. 上下相徇, 深可畏. 毁譽亂眞, 深可畏. 直言不聞, 深足,畏),” 두려운 것은 천재지변이나 기상재해가 아니다.
뜻 높은 지식인이 세상을 등지고, 염치(廉恥)와 도덕(道德)이 무너져 못하는 짓이 없으며, 위에서 이익에 눈이 멀자 아래에서 덩달아 설쳐대고, 소인을 군자라고 천거(薦擧)하고 군자를 소인이라 내치고, 보다 못해 직언을 해도 들은 채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 두려운 일이다. 왜 옛날 분들이 입현무방(立賢無方)과 유재시용(惟才是用)을 인사의 지침으로 삼았는지 돌이켜 보고 성찰(省察)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