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포천은 8·15해방 후, 영중면의 일부와 영북면, 이동면을 북괴들에게 내주었다가 6·25후 되찾은 군이다.
해방 무렵 38선 이북을 차지한 북괴들은 영평천 이북만을 차지하고 가끔 실제 38도선인 양문리까지 차지하려고 남침을 자주하였다. 38경비괴뢰군의 만행이었다. 8·15직후 북괴 38경비대가 생기기 전 소련군대는 38선을 지키며 자유통행을 묵인하였으며 편지도 주고받았으나 북괴들의 검열을 거친 우편물이 오고 갔다. 일본군에게서 빼앗은 트럭을 몰고 장거리(신읍)에 와서 물건을 사가기도 하였다.
그래서 소련말을 조금 알게 되었다. ‘카레스케(한국인)’, ‘야폰스케(일본인)’, ‘우라(만세)’, ‘로스케(소련인)’, ‘뚜다(가자)’ 등을 알게 되고 소련군은 요강에다 밥을 퍼 먹고 변소에다 돼지고기를 걸어놓고 잘라 먹고 식구가 많은 집 신발을 훔쳐다가 식구가 단촐한 집에 나누어 주고 여군들이 잘 생긴 남자를 납치해 집단 성욕파티를 연다는 얘기가 돌았다.
혼인을 하려고 혼약을 맺은 남녀가 38선으로 각기 나누어져 결혼을 파혼시켰다는 얘기도 돌았다. 북괴 공산당에게 부역하여 재산을 몰수당한 지주(地主)들이 남으로 내려 왔는데 집안의 재산 목록 1호인 황소를 몰수당한 게 억울하다고 통곡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호병동 박점만 씨가 사냥총을 들고 38선을 넘어 빼앗겼던 소를 되찾아 주었다고 무용담을 소문내기도 하였다.
38경비대는 남·북 무역을 하였다. 남쪽에서 아스피린, 다이야찡 등 약품을 북으로 갖고 가고 북에서는 남쪽으로 북어를 보내오는 물물교역을 하였다. 장사가 북에서 열다섯 명의 38경비대원을 때려눕히고 남쪽으로 38선을 넘어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북한에서 생산된 식료품을 38경비대나 소련군이 소비하고 쓰레기를 영평천에 흘려보낸다고 했다.
38선을 넘어 허모 씨가 신북면 심곡리 국사봉 기슭 허씨 종가에다 빨치산거점을 만들려다가 경찰 토벌대의 습격으로 북으로 도망쳐 가고 초등학교 교재용 5만분의/대형지도가 월북 간첩에 의해 북으로 넘어가고 군내면 남로당 골수당원이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심문도중 사망하였는데 수천명의 전국 남녀남로당원들이 구름같이 걸어서 몰려와 큰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산정호수는 김일성 별장이 되고 38선 전투에서 포천 경찰서 경찰들은 용감히 싸우기도 하였다.
우리는 38선의 한국전쟁사를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지 않나? 생각할 때가 많다. 5·6군단과 협력하여 반공애국 교육 38기념관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6·25당시 38선을 지키던 독수리부대용사들의 공도 잊은 것은 아닌가? 책방에는 ‘어린이 나라’ 월간지가 처음 진열되고 ‘내가 넘은 38선(일본여자지음)’과 ‘패주(敗走)→일본 동남아 전선 패망기’ 소설이 진열되고 윤석중 동요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