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푸틴(Grigory E. Rasputin, 1872~1916)은 러시아의 요승으로 농민 출신이었으나 1911년 혈우병으로 고생하던 황태자의 지병을 말끔히 치료하여 황실의 신임을 얻으며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수상을 비롯한 러시아 의회에서는 라스푸틴의 방탕한 생활에 우려의 시각을 보냈다. 특히 라스푸틴이 황실의 신임을 바탕으로 국가 대사에 참견하자 더욱더 경계하며 라스푸틴을 추방하는 방법도 꾀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913년, 러시아 시민들은 라스푸틴과 같은 난봉꾼이 러시아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이와 더불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황실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해 로마노프 왕실은 300년 기념일을 맞았지만 대중은 그들 앞에 나타난 니콜라이 2세에게 싸늘한 반응만 보였다.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은 니콜라이 2세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라스푸틴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사이 러시아는 독일에 크게 패하면서 러시아의 왕권은 또 한 번 급격히 흔들렸다. 1915년 4월, 니콜라이 2세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러시아군을 몸소 지휘하기 위해 전장에 나서면서 알렉산드라 여왕이 권력을 잡자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정점에 달했다. 이에 1916년 12월, 황태자를 중심으로 한 암살단은 라스푸틴의 와인에 청산가리를 탔다. 그러나 라스푸틴이 죽지 않자, 다급해진 암살대원이 권총을 난사하여 살해한 후 시체를 강가에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모든 지식인들이 왕실에서 쫓겨나고 라스푸틴의 아첨꾼들만 왕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혁명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에게 라스푸틴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진령군이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때 성난 군사들에게 죽을 뻔한 왕후 민씨(명성황후)가 간신히 충주 장호원까지 도망갔다 50여 일만에 환궁하니 백성들은 놀랐다. 그런데 왕후는 한 여인을 데리고 와 진령군이란 작호를 받게 해 주었으니 이는 7종 천민으로 취급받던 무당에게 군봉을 내린 것으로, 여자가 당호(堂號)를 받지 않고 군호(君號)를 받은 것은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진령군이 이토록 파격적인 출세를 한 계기는 왕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속에서 지낼 때 점을 쳐 주었기 때문이다. 왕후가 숨어 지내기 하도 갑갑하여 민응식이 불러온 무당이 진령군이었는데 자칭 관우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이때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곧 환궁할 것이며 그 날짜까지 알려줬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가 예언한 그 날짜에 환궁하게 되자 명성황후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 후 그녀는 대궐로 들어가 살며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날마다 왕실을 위해 산천 기도는 물론이요, 굿판과 제사는 쉴 날이 없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임금께 아뢰어 봉군의 은전, 즉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이렇게 신분상승을 한 그녀는 양반을 벼슬에 임명하고 내쫓는 것도 마음대로일 만큼 권세를 휘둘렀다. 진령군에게는 김창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다니며 실세 노릇을 하자 조정의 고위 관료들 중 몇몇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거나 의자(義子)가 되기까지 했다.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친다고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 2천 봉에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얹은 것도 이때 일이다. 그로 인해 국고가 탕진되고 있어도 명성황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령군만 믿었다. 게다가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벌였다.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지도 어느덧 11년.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사간원 정언 안효제였다. 고종은 대로하여 그를 전라도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한 후 낙향해 버렸다.
그러나 요지부동이던 진령군의 영화도 드디어 망할 날이 왔으니 그때는 고종 31년(1894년)이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 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진령군이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 주었다. 그녀는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쫒겨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이듬해 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강력한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얼마 뒤 따라 죽었다.
국정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의미하며 농단이란 이익이나 권리를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함을 말한다. 즉 국정농단이란 개인의 사익을 위하여 교묘하게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국정이 농단 당한 국가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4·19 혁명과 6.10 민주항쟁 후, 잠깐을 제외한 대한민국 역사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최선봉으로서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 국가원수들의 마지막은 항상 비참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왔다. 심지어 국정을 민간인에게 위탁하는 수준까지 오고야 말았다. 국정이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OECD 국가 회원국이라는 자만심과 등치만 커진 경제적 자대만 들이대며 정치적 발전은 구태의연한 행보를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이제 겨우 100년도 안 된 68년째이다. 대한제국 말에 주변 열강이 우리나라 주변에 힘겨루기하는 틈바구니의 역사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역사를 예측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의 안보위협과 세계경제가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는 경제적 위기의 틈바구니에서 국력을 더는 낭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에 도덕과 바른 생활이라는 교과 과목을 수강한 세대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사회지도층들과 재벌들이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 여와 야는 국가 안보의 공통된 틀 안에 국민을 위한 민족중흥의 공통된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출세해서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위정자와 부자가 되어 편히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선조들은 국가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다. 피 흘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지는 못할지언정 광화문에 우뚝 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애민 정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대한민국은 아린 가슴으로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선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5천만의 함성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