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이 없으면 정해 놓고 마음을 쓸 데가 없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
원전(原典) : 맹자 등문공ㆍ양혜왕편-無恒産而有恒心者(무항산이유항심자) 唯士為能(유사이능). 若民則恒産(약민즉항산) 因無恒心(인무항심). 苟無恒心 (구무항심) 放僻邪侈(방벽사치) 無不為己(무불위기). 及陥於罪然後(금함어죄연후) 従而刑之(종이형지) 是罔民也(시망민야).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 백성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안정 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부정하고 허황되어 이미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孟子)는 중국의 전국시대 인물로 공자님보다 100년 후인 BC 289-372 년간 살았던 인물로 공자의 손자 자사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유가의 학맥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후세에 전하였으므로 공자 다음의 성인이란 아성공(亜聖 公)의 존호를 올려 드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성균관과 전국 231개의 향교에서 춘ㆍ추계 석전을 봉행할 때 두 번째로 헌향 헌배를 한다. 맹자의 주장은 “백성을 하늘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얼마만큼 안정된 생활을 제공하느냐 하 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며 백성들의 실생활을 돌보는 것이 임금의 도리이라.” 고 설파한 것이다. 그 당시는 오와 월의(呉ㆍ越)전쟁이 끝나고 연ㆍ제ㆍ조ㆍ 한ㆍ위ㆍ초ㆍ진 등 칠웅이 할거 하며 힘과 힘의 대결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BC 481~221)의 대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仁政)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 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 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경전 맹자 (孟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 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富)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 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 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 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経)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経〉 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 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 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경전 맹자(孟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 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 다. 2천 년 전의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바는 지금도 정치가 지향하는 목표와 조금도 다르지 아니하다.
참고한 자료 : [서강대자전-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이야기 고사성 어] 장기근 박사 감수 명문당 출판 책 중에서-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 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