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聖書)상의 바오로라는 사람과 조선 시대 최고의 천재라고 알려져 있는 이가환(李家煥)이라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 일생을 살았는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바오로라는 사람이 사올로 시작해서 바오로로 순교하듯이 이가환이라는 사람 역시 천주교를 박해하는 데에 앞장섰다가 종국에 가서는 스스로가 천주교로 인해 목숨을 바치는 기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로 상에는 당쟁의 역할 역시 치열하게 작용한 바가 없지 않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우선 바오로라는 사람부터 보자.
바오로라는 사람은 로마시민인 유대인으로 율법을 실천하는 데에 열심하였던 청순한 바리사이였다. 그러기에 그는 율법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이지 절대로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과거사건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정양모) 이런 이유로 가뜩이나 다혈질적인 인간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이다.
서력기원 33년경! 그가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로 가던 중에 그를 감싼 빛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듣는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울은 그만 눈이 멀었다. 들리는 소리대로 움직여 사울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나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개심(改心)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때부터 사울은 바오로가 되어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난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데 중심축을 한 사람이라면 바오로는 교회를 세계화시키는 데에 앞장 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오로의 전도 거점이었던 안티오키아는 요즈음 한창 문제되고 있는 시리아의 고도(古都)였다.
바오로의 순교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다만 세례자 요한 처럼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바오로와 비슷한 행적을 보인 한국인으로 필자는 정헌(貞軒)이가환이라는 인물을 가끔 생각해 본다.
이가환이란 인물은 여주 사람으로 정조 때의 명신이다. 조선조 최고의 천재로 소문난 사람이다. 당대의 천재로 소문난 다산(茶山 정약용)까지도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고 하니 우리같은 둔재로는 어느 정도인가 감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종조부(從祖父)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실학에 눈을 떴다. 이가환의 누이가 한국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어머니다.
어느날 이가환이 이승훈으로 하여금 영세를 받도록 권유한 최초의 천주교인인 이벽을 찾아가 그로부터 천주교교리를 듣고 자못 심심취하여 교리서를 국문으로 번역하면서 서학(西學)에 한 발짝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그는 서학을 신앙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으로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탄핵당하는 표적이 되었다. 그는 이 표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獄)때에는 광주(廣州)부윤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에 대해 모진 박해를 가하였다.
이가환은 그 뒤 개성유수를 거쳐 형조판서까지 수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1795년 주문모의 입국때 반대당의 모함으로 충주목사로 쫓겨났다. 이때도 이가환은 천주교도 박해에 앞장서서 갖가지 엄한 형벌로 다스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천주교는 회초리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아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더 퍼져 나갈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에 천주교인들을 박해한 것이 후회스러워였을까! 정조 사후인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때에는 이승훈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모진 매질과 불로 지지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사도 바오로와 이가환과 같은 증인이 있어 오늘의 천주교가 있고 그로 하여 프란치스코와 같은 교황의 한국방문도 기획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