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정(司正)이란 말이 국민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국민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정이란 공직(公職)에 있는 사람의 규율(規律)과 질서(秩序)를 바로 잡는 일을 말한다. 그렇다면 풍헌이란 무엇인가? 풍교(風敎)와 헌장(憲章)의 줄임 말이다. 풍헌이란 조선왕조시대에 면(面)이나 이(里)의 일을 맡아보던 향소(鄕所)의 한 소임(所任)을 이른다. 그런 소임을 맡아보던 관리를 풍헌관(風憲官)이라 부른 것이다.
풍헌관이란 요즘으로 말하면 바로 사정관(司正官)을 말하는 것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기강(紀綱)을 바로 세우고 이들을 감찰(監察)하는 일을 하는 관리를 말하는 것이다.
춘추시대 남방의 강대국 초나라 장왕(莊王) 때 손숙오(孫叔敖)라는 재상이 있었다. 손숙오가 재상이 되자 호구장인(狐丘丈人)이라는 정체 모를 사람이 손숙오를 찾아와서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고, 녹봉(祿俸)이 많은 사람에게 보통 사람들은 원한을 가지는데 시기(猜忌) 혐오(嫌惡) 원망(怨望)입니다. 들어보셨소?” 손숙오는 “저는 적어도 그 세 가지는 피하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크기 때문에 가능하면 내 몸을 낮추고 사람들에게 겸손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시기와 혐오를 피하고 있고, 녹봉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혐오감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숙오는 평생 개인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자식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받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들은 나무를 베어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곤궁하게 살았다. 그 생전에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던 악사(樂士) 우맹(優孟)이 저잣거리에서 나무를 지고 팔러 나온 그의 아들을 보았다.
궁궐로 돌아온 우맹은 손숙오 분장을 하고 그의 언행을 흉내 내며 1년 가까이 지냈다. ‘우맹의관(優孟衣冠)’이란 고사성어의 배경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장왕은 손숙오의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배려했다.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위해 바르게 행사하기는커녕 무조건 휘두르려고 하면 백성들은 당연히 혐오하게 된다. 여기에 많은 녹봉까지 받게 되면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흐르기 쉽다. 비리(非理)와 부정(不正)이 뒤따르는 것은 필연이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받는다. 요즘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세태와 영락없이 똑같다.
땅 투기, 부동산 투기는 물론 돈이 된다면 어떤 것도 서슴지 않는 일부 지도층과 사회 지도층의 모습을 보라! 이 파렴치(破廉恥)한 공직자들과 사회 지도층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사정을 말하고 풍헌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세종시대에 신개라는 풍헌관이 문어 두 마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형조에서 탄핵(彈劾)했다. 세종은 비록 문어 두 마리라는 보잘 것 없는 뇌물(賂物)일지라도 감찰과 사정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세종은 단호(斷乎)히 말한다.
‘만약 보통 관원(官員)이라면 마땅히 문제 삼을 것이 없겠지만 개는 풍헌관(風憲官)으로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일이 있었으니 세상의 여론이 어떻겠는가. 천관(遷官)시킬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신개의 혐의를 두고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신개 친척의 하인이 고성에서 문어가 아닌 생대구 두 마리를 받았으나 이는 신개와 무관한 일로 밝혀졌다.
그러나 신개는 사직(辭職)을 청한다. “풍헌의 직책은 위로는 조정의 잘되고 잘못된 점과 아래로는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원의 시비와 사정을 말하지 않음이 없아오니 그 임무가 크고 직책의 무거움이 이와 같거늘 신은 용렬한 사람으로 이미 부끄러운 마음이 많사온데...” 사직소(疏)의 이유이다.
세종은 풍헌관에게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요구했고 신개 자신도 이를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세종의 치세(治世)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세종의 엄격한 리더십과 핵심 관료들의 예의염치(禮義廉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