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공(子貢)이 공자님에게 묻기를 사여(子張)와 상야(子夏)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여는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이고, 이에 반하여 상야는 소심하여 과감성이 부족하다.”
자공이 “그러면 사여가 낫다는 것입니까?” 공자님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이나 모자라는 것도 불안전하므로 중용의 덕은 얻지 못한 것이다” 참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깊은 뜻이 있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침이 미치지 못함만 못할 수도 있다. 배부름이 배고픔보다 물론 좋지만 배가 지나치게 부르면 병이 나게 된다.
어느 날 자장(子張-師)이 공자께 이렇게 물었다. “선비로서 어떻게 하면 달(達)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반대로 자장에게 물었다.“네가 말하는 달(達)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자장은 “제후를 섬겨도 반드시 그 이름이 나고, 경대부(卿大夫)의 사신(私臣)이 되어도 또한 그 이름이 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문(聞)이지 달(達)은 아니다. 본성이 곧고 의(義)를 좋아하며, 좋은 말과 편안한 안색으로 상대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신중히 생각하여 타인에게 공손하며, 그 결과 제후를 섬기든, 경대부의 사신이 되든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달(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덕(仁德)이 있는 체하면서 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그리고서도 그에 만족하고 의심치 않는다면, 제후를 섬기든 경대부의 사신이 되든 군자라고까지 불리어진다. 이것을 문(聞)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여 줌으로서 자장(사)의 지나친 성격과 허영심을 고쳐 주려고 말씀하시자 자공(子貢)이 자장(사)과 자하(상) 중에 누가 더 어진 선비냐고 물음으로서 논어의 선진편(先進篇)이 만들어 졌다.
자장(사)과 자하(상)는 퍽 대조적 인물로 생각된다. 자장은 기상이 활달하고 생각이 진보적이고 과감한 추진력이 있는가 하면 자하는 만사에 조심하며 모든 일을 추진함에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세심하고 현실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인정이 간다.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도, 자장은 천하 사람이 다 형제라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였는데, 자하는 ‘나만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께서 말한 과유불급은 굳이 두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원칙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그 지나치다, 혹은 미치지 못한다 하는 표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중용(中庸)인 것이다. 미치지 못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은 중용이란 말은 다시 시중(時中)이란 말로 표현된다. 시중은 그때그때 맞게 한다는 뜻이다.
어제의 중용이 오늘에도 중용일 수는 없다. 이것이 꼭 옳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원불변의 진리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손으로 만져 쥐어 보일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환히 통해 아는 성인이 아니고서는 이 시중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께서는 천하도 바로 잡을 수 있고, 벼슬도 사양할 수 있고,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만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과 중용이란 말을 누구나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공자의 이 참뜻을 안 사람은 드물다. 공자를 하늘처럼 받들어 온 선비란 사람들이 고루(古陋)한 형식주의와 전통주의에 빠져 시대를 그릇 인도하고 나라를 망치게 한 것도 이 과유불급과 중용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고사가 현실감 있게 사용되는 것은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한 자료 : [서강대자전-過猶不及], [이야기 고사성어] 장기근 박사 감수 명문당 출판 책 중에서-過猶不及), [김석환 역주 논어 중 제11 先進篇(선진편) 15장 過猶不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