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도 아름다운데, 그 위에 꽃까지 얹어 놓았으니 더욱 아름답다는 뜻. 좋은 일에 더 좋은 일이 더함]
출전 : 왕안석(王安石)의 즉사(即事-즉흥시라는 뜻)
河流南苑岸西斜 -(하류남원안서사) 강은 남으로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우는데 風有品光露有華 -(풍유품광로유화) 바람엔 맑은 빛이 있고 이슬에는 꽃이 있다 門柳故人陶令宅 -(문류고인도령댁) 문 앞의 버들은 옛사람 도령의 집이요 井桐前日總持家 -(정동전일총지가) 우물가의 오동은 전날 총지의 집이다 嘉草欲覆盃中淥 -(가초욕복배중록) 좋은 모임에 잔속의 술을 비우려 하는데 麗唱仍添錦上花 -(여창잉첨금상화) 고운 노래는 비단위에 꽃을 더한다 便作武陵樽粗客 -(편작무릉준조객) 문득 무릉의 술과 안주를 즐기는 손이 되어 川源應未少紅霞 -(천원응미소홍하) 내 근원엔 응당 붉은 노을이 적지 않으리라
왕안석(王安石)은 중국 송나라 인종 시대의 개막과 거의 비슷한 때(1021-1886) 태어났으며, 자를 개보(介甫)라 하고, 호가 반산(半山)이며 강서성 무주 임천현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할아버지 대부터 관직에 올라 아버지는 강녕부 부지사까지 지냈다. 전통적인 명문대가는 아닌 가문인데, 그나마 왕안석이 19세 때 아버지가 급사하면서 한동안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학문을 좋아했던 왕안석은 하인이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서 스승도 두지 못한 채 꾸준히 책을 읽었다.
스승이 없어서인지 공부의 범위가 넓고 이해 방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는 공부는 즐거워도 벼슬살이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머니와 오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그가 녹봉을 받는 것 말고 방법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23세에 과거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여러 곳의 지방 수령을 역임하고, 그 후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며, 왕안석의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잠깐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067년, 영종이 일찍 죽음에 따라 그의 맏아들 조욱(趙頊)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함으로써(송 신종), 마침내 ‘왕안석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왕안석은 부 재상인 참지정사(參知正使)에 오르면서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등 수 많은 법령을 제정하여 개혁정치를 시행하였지만 이런 개혁은 당연히 처음부터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론은 신법의 역효과나 시행상의 어려움 등을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왕안석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 도참설을 들먹이는 등 신법은 불길하며 국가에 변고를 가져올 것 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은 삼부족론 (三不足論)을 주장했다고 한다. “개혁을 할 때 천재지변(天災地變)도 신경 쓸 것 없고, 압력 여론 언론(言論)에도 신경 쓸 것 없고, 조종지법도 신경 쓸 것 없다”고 주장을 했던 것이다.
유교 정치사상의 기본을 깡그리 부정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사실 이는 왕안석의 말은 아니며, 나중에 그의 말이라고 일부의 사가가 주장하였다고 한다. 군비 조달로 피폐한 국력과 국가의 경제를 살리고자 한 개혁안은 지금도 표본으로 하는 법률안이 나올 정도로 위대한 정치가요 경제가이지만 후세 사가들은 북송패망의 주역, 실패한 인물, 소인, 간신으로 기록되는 반면, 시와 산문 분야에는 당송의 사대가.
송나라의 최고 시인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무릉도원의 이상 세계를 그리며, 옛 진(晉)나라의 팽택령을 지낸 오류선생 도연명의 시를 숭상하며 그의 살던 곳까지 숭상하여 지은 수많은 시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도연명 같은 명사의 초청을 받아 좋은 안주와 술을 실컷 마시며 그런 자리에 노래와 춤이 있다면 그 더욱 좋지 않겠느냐는 첨금상화(添錦上花)가 금상첨화로 바뀌어 1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참고한 자료 : [서강대자전-錦上添花], [이야기 고사성어] 장기근 박사 감수 명문당 출판 책중에서-錦上添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