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 아니었다. ‘산자수려하고 경치는 빼어났으나, 백성들이 농사짓고 살기에는 땅은 메마르고 거칠었다’ 유사 이래 처음 포천현 인구를 기록한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로 1222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되어있고 영조 때‘여지도서’에는 1477명으로 200여명 늘었고 1789년 정조 때에 10398명으로 인구가 조금씩 늘어났다.
1842년에 만든‘경기지 포천현 편'에 인구가 13131명으로 53년 만에 2733명이 증가하고 있다. 세종 때 인구가 포천땅에 1222명이 살았다면 거의 포천에는 사람 만나기가 어려웠을 정도이다.
해룡산 왕방산 일대에서 세종께서 군사훈련을 하고 잠을 잔 곳이 영평의 매장원(每場院)이나 굴동(堀洞)이라고 왕조실록에 30여회가 기록되고 있지만 이 지명들은 알 수 가 없다.임금이 포천,영평에 와서 군사 훈련이나 사냥을 하고 취침까지 한 곳이 설화로도, 전설로도, 비슷한 지명으로도 남아 있지 않는다면 왕방산에서 영평까지 별로 사람이 살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한다.
당시 군사훈련장소로 비밀에 부치고 보안을 유지했을 것이다. 감히 민간,촌로들이 수군거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지역들이 역사에 묻혀버린 이유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고장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고 비록 살았다 하더라도 오래 살지 못하고 이사 갔을 것이다.
4. 호병골 이야기
포천의 호병골은 조선 초기 특히 세종 때에 세종께서 수백 수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사냥을 하고 군사훈련도 하면서 호병골 어디쯤에선가 군사들이랑 점심도 먹으면서 휴식도 취한곳이 아닐까?
취사장을 만들어 2천여명의 군사에게 따뜻한 점심을 먹였을까? 아니면 각자 준비해온 주먹밥이라도 앉아서 맛있게 먹지 않았을까? 호병골 어디쯤에서인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호병골은 조선조 개국과, 태조의 비(妃)와(嬪)이 살던 곳이고 세종대왕 때 특히 세종대왕의 역사가 숨 쉬는 곳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이 마을에 금년부터 새 역사를 쓰기로 했다.
지금 이 마을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호병골에 대한 새 역사를 찾아 쓰고 있다. 내용인 즉, 2016년 평생학습마을 공동체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신읍4통(호병골) 학습마을의 운영이다.
금년 3월 21일부터 11월 22일까지 총 26차시 72시간으로 대진대 평생교육원과 포천시가 주최한다. 가요교실 등 예능 프로는 학습의욕을 고취하고자 짜여졌지만 ‘마을해설’, ‘역사속의 호병골’, ‘마을의 숨은 이야기’, ‘시나리오’ 구성 등 일련의 학습활동은 이 마을의 정체성을 찾고 호병골의 새 역사를 일궈 역사가 깃든 고장을 널리 홍보하고 이를 통해 ‘마을경제’를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자연부락은 인구감소와 지역사회 콘텐츠 부재로 슬어져가는 위기에 처해 있다. 포천은 경기도 31개 시군 중에서 인구 감소지역이 되고 있어 위기의식을 갖고 대비해야 한다.
자연부락마다 삶의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 왕방산 호병골이 새 역사를 만드는 으뜸마을로 태어나고 세종의 묻힌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어 꽃피우게 해야 한다.
문헌자료 포천군지(下) 포천시 향토사료 총람(下) 포천문화원, 기타 포천관련 인문학연구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