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무리 속에 끼어 있는 한 마리의 학이란 뜻으로, 많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섞여 있음을 이르는 말]
*출전 : [獨立不覊 昻昻然 野鶴如在鷄群] - 晉書(진서) 7세기 당나라 때 지은 晉(진)나라 역사서) 중국의 위 진시대(魏晉時代)에는 글을 많이 배운 선비들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문학과 노장(老莊)의 사상, 음악 등 청담(淸談)을 담론하며 세월을 보내던 선비가 적지 많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嵆康)·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향수(向秀) 등이다.
이들 가운데 혜강(嵆康)은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시 그에게 열살짜리 아들 혜소(嵆紹)가 있었다.
혜소는 장성하자 혜강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산도가 혜소를 무제(武帝:265~290)에게 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경(書經) 강고편(康誥篇)에 보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죄는 서로 연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혜소는 비록 혜강의 아들이지만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郤缺)에 뒤지지 않을 만큼 총명합니다. 그를 비서랑(秘書郞)을 시키십시오” 무제는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전(嵆紹傳)에는 혜소가 낙양(洛陽) 궁궐로 들어갈 때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다음 날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에게 “어제 많은 사람들 틈에 구름같이 끼어서 궁궐로 들어가는 혜소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의젓하고 늠름하여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昻昻然如 野鶴之在 鷄群一鶴)”라고 말하자 왕융(王戎)은 “그대는 아직 그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어서야”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혜소(嵆紹)가 아버지인 혜강(嵆康)의 인물에는 미치지 못하여도 그 무리에서는 가장 뛰어 났다고 하여, 여기에서 鷄群一鶴(계군일학)이라는 고서성어가 나와 지금도 많은 무리 중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있을 때 표현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왕융은 또 말했다. “혜소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 뛰어 났었다네” 왕융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혜소는 부친만은 못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기서 ‘계군일학’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 뜻은 학립계군(鶴立鷄群)·군계일학(群鷄一鶴)·계군일학(鷄群一鶴)·계군고학(鷄群孤鶴) 등과 같이 통용된다. 혜소는 나중에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여 혜제(惠帝) 곁에서 직언(直言)을 올리는 몸이 되어 올바르고 곧게 처신하였다고 한다.
영흥 원년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혜제는 이를 진압하려고 군병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蒙塵(몽진-왕의 피란)을 가게 되었다. 혜제의 부름을 받아 시중(侍中) 혜소(嵆紹)가 당도하였을 때는 혜제의 군이 이미 패하였을 때였다. 혜소는 문무백관이 모두 도망해 버린 곳에서 홀로 의관을 바로하고,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는 御駕(어가) 앞에서 몸으로 혜제를 감싸며 지키다가, 우박 같이 쏟아지는 적의 화살에 맞아 혜제의 어의(御依)를 선혈로 물들였다. 난이 평정된 뒤 근시(近侍)들이 어의를 빨려 하자 혜제는 “이것은 혜소가 흘린 충성의 피 이다. 씻어 없애지 말라" 하였다고 한다.
참고한 자료 : [서강대자전-鷄群一鶴] , [이야기 고사성어] 장기근 박사 감수 명문당 출판 책중에서-鷄群一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