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38선 성동교를 넘어 내려온 북한군은 실제 북위 38선인 양문리를 빼앗고자 수차례 남침을 감행, 포천군 영중면을 괴롭혔다. 그러나 한국군과 경찰은 38선 북쪽 영평천을 경계로 한 점령 지역을 사수한 가운데 6·25를 맞았다. 그리고 북한 괴뢰군의 남침에 대비하여 산병호나 방공호 등 도로방어진지 교통호를 만들었는데 한국 육군9연대 부대와 민간인들이 협력하여 구축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 장비가 부평 조병창으로 정비·수리를 위해 가 있었고 육군 본부에서는 일본군 병기 장교 출신인 채병덕 소장이 참모 총장이 되어 6월 24일 밤 장교 구락부(클럽)개관식에서 본부 참모들이 술에 만취되어 6·25를 맞았다. 미국은 국무 차관보를 특사로 38선을 시찰 ‘전쟁은 안일어 난다’는 보고를 트루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통에 ‘맥아더 라인’이라고 하는 미 극동 군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켰다.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군 8로군 출신 포병사령관 ‘무정’을 선봉대장으로 하고 소련 군사고문단의 도움으로 쏘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는데 한국군 참모총장 채소장은 북진하면 하루만에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꼽는다고 술 취해 잠자면서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떠들어 댔는데 한국군은 미군들이 사용하다 주고 간 사용 기한이 지난 무기뿐이었다.
6·25는 당시로서는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영국 수상 처칠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제발 유럽 전쟁에 참전하여 독일군을 격멸하고 내 조국 대영제국을 구해 달라고 했듯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동경에 있는 맥아더 미국 동군사령관에게 간청하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군을 침략군으로 규정, UN군을 파견 섬멸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당시 미국무성이나 UN에는 이승만 박사의 대학 동문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첫 참전 UN군 대대는 스미스 부대로 오산 전투였으며 사단장은 ‘띤 소장’으로 괴뢰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괴뢰군은 남침하면 남로당원들이 남한 곳곳에서 봉기하여 전쟁을 하지 않고도 통일이 된다는 부수상 박헌영의 말을 믿고 중국이나 소련도 남침을 김일성에게 허락했던 터였다. 그래서 6·25가 발발하자 중국과 소련은 남한 남로당의 봉기를 보고해 달라는 전문을 김일성에게 보냈으나 허사여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강가에서 자기 권총으로 총살하였다.
그때 북한은 한국은행 조폐국에서 한국은행권 No42를 수억원을 찍어서 전국 공산당원에게 뿌려 경제를 혼란시켰다. 내 고향 포천금융조합도 예외는 아니어서 No42 북한 괴뢰들이 인쇄한 한국은행권을 잔뜩 짊어지고 정모 씨 등 부역 공산당원들이 북으로 도망쳤다. 지금쯤은 그들은 월북한 처지를 비관하며 한숨짓고 포천을 바라보고 울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