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세사에 몰입하다 보면, 너무 놀라워 이런 역사도 있었구나 하며 너무나 미숙하고 부족하였던 기가 막힌 역사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1882년 대한제국이 미국과 맺었던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의 한문본(漢文本) 제1조에는 “대한조선 군주와 대아미리가(大亞美理駕) 합중국 대통령은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 : 업신여겨 모욕함)하는 일이 있게 되면 필수상조(必須相助 : 반드시 서로도움)한다”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당시 고종(高宗)을 비롯한 무능한 집권 세력들은 ‘필수상조’라는 말을 미국의 조선에 대한 방위조약쯤으로 알고 하늘처럼 떠받들며 만족해 했다. 그러나 조약의 영문본에는 ‘필수상조’라는 말을 표현할 해당되는 영어단어가 없었고 무능했던 우리 조정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미국과의 수교협상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청나라 권력자 이홍장(李鴻章)이 보낸 중국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는 한문본과 영문본을 대조해 볼 수 있을 만큼 영어실력을 갖춘 외교관이 한사람도 없었다.
조선이 구미(歐美) 국가와 맺은 최초의 개국(開國)협상은 이처럼 위태롭고 불안전한 형편이었다. 이듬해인 1883년 류셔스 푸트가 미국 전권공사로 부임 할 때에는 18세의 청년 윤치호(尹致昊)가 통역으로 따라 왔었지만 당시의 윤치호는 일본주재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에게서 하루에 1시간 씩 겨우 5개월 동안 영문법을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보다 28년 먼저 미국과 조약을 맺어서 네덜란드 언어로 외교 교섭을 했고, 조문검토와 번역은 일본 최초의 미국유학생인 만지로(萬次郞)에게 맡겼다. 만지로는 비준서 교환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서점에서 유창한 영어로 웹스터사전을 찾아 미국인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영어 실력자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모든 면에서 일본에 뒤쳐지고 있었다.
10년 전 이던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타결을 했을 때, 이를 두고 제2 ,제3의 개국이라는 말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말 속에는 134년 전의 기막히고 한심한 뼈아픈 역사의 기억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민족의 자랑 반기문은 UN사무총장이 되어있고, 김용은 세계은행총재가 되어있다. 유능한 윤병세는 외교통상부장관직을 잘 수행하고 있으며, 이 나라 외교협상 참가자들은 영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기업들은 세계를 주름잡고 누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나라의 제일 큰 문제점은 국내 정치의 문제일 것이다. 핵을 가진 북한 앞에서도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우선되는 것을 보면 한심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