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일어나!!”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보니, 오빠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나 그리고 여동생 두 명 이렇게 여섯 식구다. 어제까지 별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전쟁이 났단다. 바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다.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서울 외가댁으로 가야한다며 허둥대셨다. 아버지는 포천경찰서 경찰관이셨는데, 어머니한테 몸조심하고 아이들 잘 보살피라고 전하고 우리의 손을 꼭꼭 잡아주시고 전쟁터로 가셨다.
피난길에 어머니는 갓난아기인 막내를 오빠는 큰 동생을 업고, 나는 종종걸음으로 외갓집을 향해 갔다. 지금은 축석령 고개가 4차선 넓은 직선길이지만 피난길 그 때에는 꼬불꼬불한 도로가 무척 길었다. 포천에서 축석령 고갯길까지 등에 진 가방이 무거웠다. 금붙이와 은수저가 들어있는 가방은 너무 무거워서 “버리면 안돼?”하고 울먹이며 물었다. 그러자 오빠가 “그래 버리자!”하며 저 멀리 논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비는 억수처럼 쏟아졌다.
비가 오는 사이 그 많던 피난민들은 한집 두 집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덩그러니 우리 식구만 남았다. 가방을 버렸는데도 나는 다리가 천근만근이라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때 마침 후퇴하는 트럭이 먼발치에서 나타났다. 나는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우리 식구를 살려주세요”하며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 8살 아이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군인들은 큰 트럭에 우리를 안아 올려 태워줬다. 그때 포 소리가 크게 울리며 불꽃을 쌩쌩 튕기며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다. 적군이 쏜 총알이다.
한참을 서울쪽으로 가던 트럭이 멈추더니 대포를 안 싣고 와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며 우리를 길에 내려주었다. 우리 가족은 또 다시 뛰었다. 한참을 뛰어가는데 대학생 청년 두 명과 마주쳤다. 의정부에서 대학 축구시합을 하는 중에 전쟁이 나서 중단하고 서울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며, 우리들의 젖은 옷을 벗기고 자신들의 가방속에서 젖지 않은 런닝셔츠를 입혀주는데 내 동생은 발목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드레스를 입은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대학생들은 동생과 나를 업고 뛰었다. 미아리쯤 됐을까? 자기네 집에 도착했다며, 몸조심하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살아 계셔서 만날 수만 있다면 큰 절 올리고 싶을 정도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고맙습니다”라고 연신 외쳤다.
쉬지 않고 걸어서 힘들에 외가댁에 도착했는데, 이미 모두 피난길을 떠난 뒤라 집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허기진 배는 채울 수 있었다.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우리는 다시 살기위해 피난을 떠났다. 캄캄한 밤이 됐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끊어져서 아수라장이 됐다. 우리는 어머니의 인솔하에 용케 강을 건넜다. 발이 부르트고 배고 고프고 꼼짝도 하기 싫을 정도로 나는 힘들었다. 겨우 기차역에 도착해 기차를 탔다.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옮기는 기차란다. 기차 화물칸 지붕 위 꼭대기에 탔다. 미국 헌병이 칼을 휘두르며 떨어지면 위험하다고 내리라고 무섭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을 죽였다. 어머니는 떨어지지 않게 우리들을 부둥켜 안으셨다.
얼마나 많은 터널을 지나갔는지 우리 모두 이빨만 하얗게 반짝였다. 그렇게 겨우 부산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업고 있던 막내는 축석령 고개에서 비를 맞고 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나더니 숨을 거두었다. 슬픔에 잠길 여유도 없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을까.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그 때를 회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