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이란 불혹지년(不惑之年)의 준말이다. 바로 논어(論語)의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에서 유래한 말이다. 불혹이란 부질없이 망설이거나 무엇에 마음이 홀리거나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이다. 혹(惑.)이란 홀린다는 것이다. 꾀어낸다는 것이다. 꾐에 홀리어 넘어가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불혹이다. 사십이 넘으면 남의 꾐에 넘어가지 않는다 해서 하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남의 마음을 현혹되게 하여 꾀어내는 것이 유혹(誘惑)이다. 남을 호리어 나쁜 길로 빠지도록 꾀어내는 것이 바로 유혹이다. 꾀어내는 말은 달콤하다. 그럴 듯하다. 그래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유혹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유혹에 넘어가는가? 요행(僥倖)을 바라기 때문이다. 횡재(橫財)를 바라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고 탐하려하기 때문이다. 땀 흘리지 않고 취하려하기 때문이다. 정도(正道)를 가야한다. 조장(助長)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과장(誇張)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첫걸음부터 스스로 가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행하지 않고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높은 곳에 이르려 한다. 하지만 낮은 데로부터 시작할 줄 모른다(人多要至高處, 不知自底處)” ‘중용(中庸)’에서는 “먼 길을 가는 것은 가까운 데로부터 비롯되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낮은 데로부터 출발한다(行遠自邇, 登高自卑)”고 했다.”
신신불미(信信不美) 미언불신(美言不信).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은 번지르르하지 않고 번지르르한 말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선자불변(善者不辨) 변자불선(辨者不善). 착한 사람은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은 착하지 않다. 노자(老子)가 마지막 81장에서 갈파(喝破)한 말이다. 노자는 믿음을 주는 말이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환심(歡心)을 살 만한 말을 하면서 그 말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일이 많음을 보고 믿음을 주는 말과 아름다운 말을 구분했다. 믿음을 주는 말은 굳이 화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진실(眞實)이 전해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감언이설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달콤한 언동(言動)에 유혹당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견기이작(見機而作). 살펴서 미리 대비하고 조치하라는 뜻이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탐심(貪心)을 버려야 한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을 멀리해야 한다. 아차!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철저한 사후조치도 낌새를 알아채고 미리 대비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判斷)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욕심이 앞을 가리면 청맹과니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럴 땐 욕심을 버리고 양심(良心)에 물어야 한다. 성찰(省察)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속셈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묻고 따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유혹의 손길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미언(美言)과 감언(甘言)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고 있는가?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유언비어(流言蜚語)에 휩쓸려서도 안 된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글들을 보라!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을 보라! 어떠한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하는 속담(俗談)이 있다. 그것을 노리는 것이다. 그것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노리는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야 한다. 개인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후손을 생각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어떠한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를 진지(眞摯)하게 물어야 한다. 어떠한 정체(政體)를 물려줄 것인가를 숙고(熟考)해야 한다.
그리고 뉘우쳐야 한다. 잘못된 언행을 뉘우쳐야 한다. 다산은 ‘매심재기(每心齋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은 허물은 고치고 나서 잊어버려도 괜찮다. 하지만 큰 허물은 고친 뒤에 하루도 뉘우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有小過焉, 苟改之, 雖忘之可也, 有大過焉, 雖改之, 不可一日而忘其悔也). 얼마나 절실한 이야기인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뉘우치고 반성(反省)해야 한다.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