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남북한 독재자들이 정적을 제거할 때 견제를 하면서 정정당당하지 못하거나 비겁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은 찾아보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오직 권력의 장기집권을 위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독재자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려는 아첨배들과 간신들이 예외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는 이 나라의 현 정치권의 모습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1955년 12월 19일, 북한의 최고재판소는 특별재판을 통해서 남한에서 신출귀몰하게 숨어 다니며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괴롭히며 남로당을 조직하고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 정권 수립에 크게 이바지하고 활약했던 박헌영을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했다. 재판의 공식명칭은 ‘미 제국주의 고정간첩 박헌영과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으로, 박헌영을 제외한 남조선 노동당 계열의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7일 후인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던 반면, 박헌영은 2년이 더 지난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사형판결을 받았고 박헌영은 1956년 7월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판결문에 의하면, 박헌영은 일제치하인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본인이 살기위해 일본경찰에 비밀조직을 모두 자백했으며 1946년 9월 총 파업과 10월 대구 사건 등을 배후에서 조종 미군정에 대해 반대활동을 지시했던 박헌영이 실제로는 미사령관 하지 중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공산당을 친미의 방향으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 조직을 미군정과 대한민국정부에 노출시켜 소위 혁명역량을 파괴하였다는 것으로 판시했다.
또 1946년 월북한 이후에는 리승엽과 리강복을 통해 미 군정에 북한의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인 1952년 9월에는 무장 쿠데타로 김일성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고 되어있다. 또 연희전문학교 교장인 언더우드와의 관계에서는 1945년 9월 9일 미군 상륙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조작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반대했어야 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였다는 점 등이 판결문 속에 나타나는 것도 주목된다. 1945년의 시점에서는 비밀조직이 아니었던 조선공산당의 책임자로서 미 군정 책임자를 만난 사실 등이 모두 간첩활동으로 인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었음이 증명됨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 직후 박헌영이 중국의 고위관리에게 북한정권을 전복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친중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는 7~8년 전의 중국 전직 고위관리와 학자들의 증언들을 감안한다면 박헌영과 남조선 노동당계열 인사들의 북한정권 전복 움직임이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재판 시점과 판결문 속에 나와 있는 전쟁을 전후한 시기 38선 이남에서 있었던 공산당 활동의 실패 등을 고려한다면 전쟁실패의 책임을 모두 박헌영에게 전가하려 했던 정치적 의도임을 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