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환(憂患)과 안락(安樂)은 대칭되는 말이다. 患은 ‘꼬챙이’의 뜻인 곶(串)과 ‘심장’의 뜻인 심(心)의 합자로 꼬챙이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라는 데서 ‘근심’을 뜻한다. 患의 모양을 보면 위에는 中자가 두 개 있고 아래엔 心자가 하나 있다. 그래서 혹자는 ‘患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에 신경 쓰느라 마음에 근심이 된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이런 풀이도 있다. ‘中자가 하나면 忠이요, 中자가 둘이면 患이다[一中則忠 二中則患].’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 가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넘어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하려고 욕심 부리면 마음에 병(病)이 생기기 마련이다. 현대인의 병도 이런 근심에서 기인(起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집안에 병자(病者)가 생기면 그 집에 우환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느 가정(家庭)이나 병자가 생기면 집안이 우울(憂鬱)해질 수밖에 없다.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나 분위기가 답답하기 때문이다.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속을 태우게 되기 때문이다. 우우(憂虞)하기 때문이다.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기 때문이다.
우환의 반대말이 안락이다. 안락은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이르는 말이다. 안락과 비슷한 말로 열락(悅樂)이란 것도 있다. 열락 역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승의 욕구(欲求)를 초월(超越)함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精神的)인 만족감을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詩人)이 말했다. 백금(白金)은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寶劍)이 된다고 하면서, 가여운 내 아들 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 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절묘(絶妙)하고 애절(哀切)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우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락에 파묻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저승사자의 호출(呼出)을 받는지도 모른다. 가난하다고 의소침(意氣銷沈)하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 하지 않았는가? 죽을 고비를 넘기면 살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물론 부(富)를 물려주면 좋다. 대물림하면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잘 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좋다.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리(The best is yet to be). 희망(希望)을 말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추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희망이란 절망(絶望)을 이기는 말이다. 기적(奇蹟)을 심어주는 말이다.
매사 잘될 거라고 주문(呪文)을 걸면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언(眞言)을 하면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를 물려주려 하지 말고 지혜(智慧)를 물려주라고 성현(聖賢)들은 말한다. 분수(分數)를 지키고 적선(積善)을 하라고 가르친다.
적선은 우환이 도망가게 하는 부적(符籍)이다. 적선은 허언(虛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빈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실행(實行)이 뒤따르고 노력(努力)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 길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우환도 있고 환희(歡喜)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안락은 그게 아니다. 노는 것이고 즐기는 것이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이다. 위선(僞善)을 하고 도선(盜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다신약(財多身弱)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지나치게 탐욕(貪慾)을 부려 재[財貨]가 넘치면 몸이 망가진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丁若鏞)은 사람들이 꽃에만 과도한 관심을 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사람들은 꽃 심고 꽃구경할 줄은 알지(種花人只解看花) 꽃이 시든 뒤 잎이 무성해지는 것을 모른다네(不解花衰葉更奢).” 꽃과 잎은 나무가 자라고 번식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잠시 피는 꽃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잎에는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우환은 생각지 않고 안락만을 추구(追求)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