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의 조선은 중종 조부터 선조 조에 이르기까지의 100여 년을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100여 년이었다. 외척간의 난투극과 공신과 척신간의 암투, 그로 인한 사화(士禍). 급기야는 세기말에 임란(壬亂)을 맞으면서 16세기라고 하는 한 세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한 세기 동안에 우리는 조선조에 우뚝 선 훌륭한 학자이자 정치인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개혁정치의 상징인 조광조(趙光祖)와 은둔의 도학자 서경덕(徐敬德)이 중종 초기 때의 사람이고 그 뒤를 이어 유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과 같은 학자들이 16세기 한 시대를 이끌어 간다. 어쩌면 후세를 위해 귀감이 될 만한 일화와 교훈을 남겨 놓기 위해 태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율곡은 퇴계에 비해 30여 년, 고봉은 퇴계에 비해 26년여의 차이가 난다. 남명은 퇴계와 동갑이다. 퇴계는 영남좌도에, 남명은 영남 우도에 자리를 잡았고 율곡은 기호, 고봉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림의 거봉들이다. 이들에 의해 사림의 정치 참여가 본격화되고 조선의 정치는 종전에 비해 한층 더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보여진다.
고봉의 경우부터 보자. 때는 명종시대, 임금이 고봉에게 정치의 요체를 묻자 고봉은 명종에게 이렇게 역설한다.
"먼저 인재등용이다. 이는 제왕의 지(智)와 덕(德)의 잣대다. 모든 일을 혼자 한다는 독선을 버려라. 제왕이 아무리 잘해도 무능하고 부패한 신하를 만나면 일을 그르치는 것, 인재등용은 그래서 중요하다. 조정은 일신(一身)과 같아 군주는 심신이요 신하는 팔다리다. 팔다리는 심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만 심신은 이목구비와 팔다리의 감지에 따라 문제를 판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명령을 내린다.
그러니 어찌 인재등용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임란의 명신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인재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재를 보는 시각이나 인재를 구하는 방법이 편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봉은 다시 말한다.
"두 번째는 언로를 뚫는 것이다. 언로는 사람의 혈관과 같아 막히면 죽는다. 임금의 눈과 귀는 그 언로를 향해 항상 맑게 열려 있어야 하고 감지되는 바가 있으면 언제나 신속하게 반응해야 한다. 임금의 눈과 귀가 막혀 있을 때에는 사대부들이 목숨 걸고 그것을 뚫어야 한다. …언로가 뚫리면 나라가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위태로워 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봉의 이 같은 말은 고봉에 한하지 않고 조선정치의 전시대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조정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는 남명을 어느 날 하루는 명종이 불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물었다. 이때 남명은 책에 다 있는데 무얼 묻느냐는 투로 "옛날의 제왕들은 신하들을 친구처럼 대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가 허심탄회하게 무슨 일이든 의논하였습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물러났다.
선조와 율곡이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거침없이 말다툼하는 것을 보면 현대의 어떤 대통령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솔직 담대하고 살벌하기조차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율곡이 선조에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가면서 공부 좀 하라고 핀잔을 주자 선조는 귀찮다는 듯 "무얼 알아야 묻지 않겠는가! 너는 강의나 해라. 나는 듣기만 할 것이니…"하고 등을 돌렸다는 기록도 우리는 본다. 어떤 신하가 선조에게 북방 오랑캐를 막아 낼 방책으로 미리 미리 장수를 길러야 한다고 말하자 선조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조정에 대언자(大言者)가 많으니 오랑캐가 오거든 대언자를 시켜 막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당대의 대신들을 비아냥거렸다. 이에 율곡은 대뜸 "학자를 향해 '큰소리나 치는 사람쯤'으로 여기면 되는 거냐"고 항의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