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年末)엔 어디서나 희생(犧牲)과 봉사(奉仕)의 손길이 바쁘게 마련이다. 犧는 牛(소 우)와 羲(숨 희)가 더해진 글자로 ‘산 제물인 소’의 뜻을 나타낸다. 牲은 牛와 生(날 생)이 더해진 글자로 산 채로 신에게 바치는 가축 곧 ‘산 제물’을 뜻한다.
기를 때는 畜(기를 축)이라 하고 제사(祭祀)에 쓸 때는 牲(희생 생)이라고 한다. ‘종묘(宗廟) 같은 제사에 쓰는 가축’으로 보통 소[牛]를 사용하는데 양(羊)으로 대신 하기도 했다. 희생양(犧牲羊)이란 말이 생겨난 이유다. ‘제사에 희생된 양’이 소 대신 바쳐진 것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써 일하거나 죽는 것을 일러 희생이라 하는 것이다.
봉사는 나라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利害)를 돌보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 을 다하여 일하는 것이다. 심신(心身)을 다하는 것이다.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떠나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봉제사(奉祭祀)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희생과 봉사라는 말은 이처럼 동전의 양면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용도(用度)는 다르다.
봉사는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희생은 바치는 것이다. 마음만 바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몸도 바치는 것이다.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자신을 의식(意識)하는 것이다. 바친다는 것은 그게 아니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초월(超越)하는 것이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란 말이 있다.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이바지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직(公職)에 충실(忠實)하는 것이다. 사익(私益)을 버리고 공익(公益)에 충실하는 것이다.
공직에 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공(公)을 생각해야 한다. 사(私)를 버려야 한다. 아니 사(私)를 초월해야 한다. 공직을 권세(權勢)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직을 갑(甲)의 자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갑질을 해서도 안 되고 복지부동(伏地不動)해서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져 민생(民生)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도 있다. 이름이 헛되이 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밑에는 절로 오솔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혜(蹊)]’고 했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예쁜 꽃이 피고 맛있는 열매가 달리면 그 아래에 자연히 길이 난다는 뜻이다. 처음 방문하는 지역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면 손님들이 붐비는 음식점을 찾으면 된다.
문지방이 닳도록 손님들이 붐비는 것은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분야에서 이름이 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명성(名聲)이 나는 데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이를 한자성어로 표현하여 명불허전이라 한 것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목민관(牧民官이) 되어야 한다. 牧은 우(午)와 복(攵)의 합자로 목동(牧童)이 들판에서 소를 기를 때 말을 잘 듣도록 막대기로 친다는 데서 ‘치다’ 또는 ‘기르다’라는 뜻이다. 목민관은 ‘백성을 기르는 벼슬아치’로 예전에 고을의 원(員)이나 수령 같은 외직 문관(文官)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목동이 소나 양을 방목(放牧)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맹수가 가축들을 습격하지 못하게 방비를 잘 하는 것과 좋은 풀밭을 찾아 가축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좋은 목민관이란 백성들의 안전에 힘쓰고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 청염(淸廉)을 갖춘 목민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청백리(淸白吏)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청백리를 본받아야 한다. 조선왕조가 500여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위정자들이 제 할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무사안일 복지부동에 빠져 있지 않은가? 국회는 나라의 틀을 만들고 행정 사법부는 그 틀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본분은 제쳐두고 당리당략과 자리다툼에만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이래서는 안 된다. 국민이 나서야 한다. 국민이 심판(審判)해야 한다. 물은 배를 전복(顚覆)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