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포천은 지명사용과 관련하여 기록을 무시하며, 의도적으로 "포천탄생 600년"이라고 인위적인 연혁을 만들어 기존에 전해지는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하려다가, 허둥지둥 미흡하게 내용을 보완하려 했으나 반론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공정성은 물론 기록을 조작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신뢰도가 높은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포천"이라는 지명을 애써 외면하고, 지명을 확정하기에 미흡한 자료인 조선후기 『문헌고략』을 근거로 포천의 지명사용 시점을 조선 태종 13년(1413)으로 확정하는 촌극을 자행하여 아직도 잘못된 연혁을 보완하지 않고 있다.
역사는 기록에 근거해야하고 정치적 현실에 의해 바뀔 수 없다는 것은, 왕조실록을 당대의 권력자가 볼 수 없게 했던 고려와 조선의 사관의 예에서, 우리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 「태조실록」 제1권 총서 89번째 기사
ⓒ (주)포천신문사
특히 조선시대는 온전한 역사 기록의 보존을 위해서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선대시대의 실록 제작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용상에 오른 뒤 온갖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유명한 연산군은, 실록에 쓰일 자료를 열람한 것은 물론 그 내용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연산군 4년인 서기 1498년 사림파 선비들이 일제히 화를 입은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했고, 사림파 거두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쓴 성종시대 사초(史草)를 두고 정치적 경쟁상대인 훈구파와 사림파 간 대립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사초 내용을 들여다본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사림파 세력을 일제히 숙청한 사건이 그것이다.
사초를 열람한 연산군의 부도덕한 파행은 다른 실정(失政) 등의 죄목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사후에도 왕이 아닌 ‘군(君)’이라 불리는 불명예까지 안게 되어 지금도 연산군이라 부르고 있다.
비단 연산군의 예가 아니더라도,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포천군읍지』에 "포천(抱川)"이라는 기록을 덮어버리기에는 그 타당성과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도 부족했던 것을 참고하여 잘못된 기록은 수정 보완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지난 2007년 8월 10일 본지를 통해 왕방산의 한자표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록을 근거로 지적한 바 있는데, 왕방산 정상에 표지석이 처음에는 '旺方山' 으로 표기된 것에 대하여, 일제 때 산 이름의 첫 자인 왕자에 날 일(日)자를 붙여 旺자로 바꿔 표기했던 인왕산(仁王山)의 예를 들고, 대동여지도와 실록의 기록들을 근거로 '王方山', 으로 고칠 것을 제안 했다.
하지만, 그 후 고쳤다는 것이 '王訪山'이었는데, 이 글자도 기록에 근거하여 가운데 자를 '方'로 바꿔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그 후 2년 동안 관계자나 언론인을 비롯한 식견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면 왕방산의 이름을 원이름으로 돌려주자고 설득했고, 지도에 대한 증거로 '대동여지도' 포천부분을 보여 주면서 왕방산 정상의 표지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많은 사람에게 역설했다.
그렇게 서서히 여론은 형성되었고 사실관계가 확인되어 2009년 여름에서야 지명위원회를 열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신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포천읍지 등 각종 문헌에 사용 시기가 가장 길고 많이 등장하는 '王方山'을 왕방산의 한자표기로 사용하기로 확정했다.
그 근거로 '성할 왕(旺)'자와 '모 방(方)'자를 사용한 '旺方山'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 이요의 묘가 왕방산 자락에 이장되면서 주로 조선 중기인 숙종. 영조 때 승정원일기나 각종 문집에 주로 나오고, '王訪山'은 1997년 간행된 포천군지에만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자료에 왕방산(王方山)의 표기가 일관되게 사용된바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어, 현재 왕방산 정상에는 '王方山'으로 바꾸어 세워 놓았던 것은 좋은 선례이다.
적어도 공정성 있는 행정이라면 기록을 근거로 잘못된 부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 말이나 『태조실록』1권 총서 89번째 기사를 비롯한 문헌에 "포천"이라는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무시하고 600년만을 고집한다면, 사초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연산군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관계자들의 성의 있는 연혁 재검토를 엄중하게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