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眞理)란 무엇인가? 진리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연의 법칙(法則)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진리요 절대적이다.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超越)해 언제나 그러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선 이렇고 서양에선 저렇고 그런 것이 아니다. 예전엔 그러하고 지금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하면 엑쏘씨스트(Exorcist)이고 동양에서 하면 샤만(Shaman)이고 그런 것이 아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그 기능(機能)은 같은 것이고 그 법칙은 같은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어디서나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한 것이다.
자연(自然)은 무엇인가?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도(道)라고도 한다. 도란 무엇인가? 도란 자연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攝理)를 철학적 용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자연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가 바로 도이다. 도는 곧 자연 그 자체이다.
도는 자연의 섭리요 이치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도의 자리는 절대의 자리요 귀일(歸一)의 자리이다. 도의 자리는 무형의 자리이다. 도는 관찰(觀察)의 대상이 아니다. 도는 통찰(洞察)의 대상이다.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유형의 것을 형이하학(形而下學)으로 그리고 무형의 것을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보았다. 도는 바로 형이상학이다. 도는 곧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道)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알아보자.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한다. 그것을 생업(生業)이라 한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기의 자리에 머물게 마련이다. 업(業)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技)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정(政)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때문에 너도나도 국회의원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정치를 하려고 매명(賣名)하는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고 이름을 드날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정(政)의 자리가 최고인가? 아니다. 정치(政治)가 다가 아니다.
정(政)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의(義)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권력(權力)을 손에 넣었더라도 의롭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의롭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정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정(政)은 정야(正也)라고 한 것이다.
의(義)는 정(正)과 통하기 때문이다. 의롭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덕(德)을 베풀어야 한다. 의는 덕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본인은 의롭게 잘한다 해도 덕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수하사람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잘못해서 물러나게 되면 ‘덕이 없어서 물러납니다’ 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인가? 덕이란 주위사람들의 도움을 말하는 것이다. 주위사람들의 협조(協助)를 말하는 것이다. 도움을 받고 협조를 받으려면 평소에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덕을 베풀라고 하는 것이다. 적선(積善)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덕은 베풀 때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덕을 베푸는 일일 것이다.
덕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덕이 최선은 아니다. 덕은 도(道)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덕망이 높다 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도는 자연 그 자체이고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한 순간이라도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생존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진리의 잣대를 비켜갈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절대와 맞설 수 있는가? 정치(政治)가.... 아니다. 권세(權勢)가.... 아니다. 상생상극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의 섭리가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영원(永遠)이란 없다는 말이다. 알아듣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