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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고신원루를 삼킨 이항복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10월 28일
 
↑↑ 이희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 운영위원장
ⓒ (주)포천신문사 
이항복(李恒福, 1556년 ~ 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오성과 한음)로 잘 알려진 인물로 우리고장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선정된 것도 벌써 오래되었지만, 인물에 관한 조명이나 선양은 그렇게 활발하지 못하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이며 고려 문인 이제현의 후손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부친 이몽량이 58세 때 네 번째 늦둥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행주대첩의 명장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헛되게 보냈었으나 상을 치른 뒤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한편 영의정을 지낸 권철은 이항복의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본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이항복을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니까 처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어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듬해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호조참의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9년 예조정랑으로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붕당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 항상 조심하였다. 선조 24년에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인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 일어났다.

이때 정여립 사건을 가혹하게 진압하여 서인의 영수 정철은 좌의정에 오르게 되고, 이에 동인은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조의 인빈 김씨가 신성군(信城君)을 낳자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당시 동인의 영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인빈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친교하고 있었는데, 이산해는 우의정이던 유성룡, 정철과 함께 세자 책봉을 논의한다. 이때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할 것을 주청하자 선조의 미움을 사고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렇게 정철이 수괴(首魁)로 몰리게 되어 누구도 찾아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항복이 꺼림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承旨) 때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고, 35세에는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호위하며 개성으로 피난을 갔고, 의주로 가는 도중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다시 두 왕자들과 먼저 평양으로 가서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를 함흥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영변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 영변을 거쳐서 의주에 이르렀고, 일본과 조선이 명나라 치려한다는 의심을 품고 있던 황응양(黃應暘)을 설득하여 명의 원병을 오게 만들고, 왕실 근위대 정비에 최선을 다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정인홍 등이 성혼을 무고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게 되어, 스스로 영의정 벼슬을 내놓았지만 와의 예우(禮遇)는 변하지 않아 계속 자문을 받았다.

평생토록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대북파에 의해서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에 반대하며 서인(西人)에 가담하였고, 인목대비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다가 1617년 12월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중풍이 재발하여 불수의 몸이 되고, 조정은 이항복의 신병 처리에 당황해했다. 1617년 이항복의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위리안치의 명이 떨어진 이후 계속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1618년 1월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부음 소식을 들은 주변의 백성들이 달려와 모두 통곡했다고 한다.

그 후에 광해군은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예장을 함은 물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사후 정충신이 이항복의 시신을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에 사지를 떠난 지 24일 만에 도착했으며,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1리 산4번지에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3년(1652년 건립) 때부터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노덕서원 등지에 제향 되었다. 신도비는 당대의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후학 상촌 신흠이 글을 짓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글씨를 쓰고, 천하의 충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전서(篆書)에 중국 황제가 선물한 운석(雲石)으로 세워졌다.

이희용 / 철학박사, 경북중학교 운영위원장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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