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의 시체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공개됐다. 분노한 사람들은 이를 갈며 가로등에 거꾸로 매달린 그의 시체에 돌팔매질을 했다. 시체는 끝내 시궁창에 떨어져 내팽겨 쳐진다. 그 다음날은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자살한 날이다.
베니토 무솔리니, 그의 최후는 이토록 비참했으나 1922년 무솔리니가 불과 39세에 이탈리아 총리에 올랐을 때 국민들은 "위대한 지도자"라며 환호했다. 무솔리니의 등장은 의회정치와 자유민주주의의 숨통을 끊어놓은 셈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조국이 지난날의 이태리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무솔리니의 독재에 복종할 태세가 돼 있었다.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란이었다. 처칠 같은 큰 정치인도 그를 "천재의 화신 "이라고 칭찬했고, 스탈린도 "현명한 사람 "이라고 평가했다.
집권 초기 무솔리니의 활약은 대단했다. 계속되는 파업과 폭동에 크게 염증을 느낀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활력을 되찾았다.
경제는 차츰 안정되어 갔고, 사회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사회도 안정되어갔다. 불편했던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도 잘 해결되었다. '제국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면 무솔리니는 진정한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5년 그는 복잡한 계산 끝에 에티오피아 침략을 결정한다. 권력의 오만과 판단력의 미숙이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꿀리는 것에 조바심을 냈고, 승승장구하는 히틀러를 지켜보며 시기심이 치솟았다. 추축국(樞軸國)의 2류 지도자로서 나치총통의 연설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견딜 수 없었다.
1940년 10월, 치밀한 작전 계획과 준비 없는 그리스 침공은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끼인 유럽 대국은 파시즘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경제적 공항과 정치적 혼돈 상태가 빚어낸 시대의 모순이었다.
어리석었던 대중은 독재를 원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무솔리니의 말 그대로였다.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역사는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정권이 새겨야 할 역사가 아니겠는가. 핵무기가 독재정권을 지켜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