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화복(禍福)이란 말을 많이 쓴다. 특히 명절이나 새해에는 누구에게나 ‘복(福) 많이 받으라’고 인사한다. 그런데 복이란 무엇이고 화란 무엇인가? 福이라는 뜻글자를 풀어보면 답이 의외로 명료(明瞭)해 진다.
福이란 넓고 가득하게 보는(示) 것이다. 그 반대가 바로 화이다. 禍는 허물(過)을 보는(示) 것이다. 示(보일 시)는 제단(祭壇)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입 비뜰어지다’의 뜻인 와(咼)와 합쳐 禍를 이루는데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진실과 어긋난 말을 하면 재앙(災殃)을 받는다는 뜻으로 푼다. ‘복막장어무화(福莫長於無禍)’라 했다. 福은 ‘화가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복 받기를 바라기보다 화를 멀리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흘휴시복(吃虧是福)’이라 하는 것이다. 손해를 보는 것이 곧 복이란 뜻이다. 제 욕심만 채우지 말고 너무 탐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자손지기(滿者損之機) 가득 차면 덜어지게 되어 있고, 휴자영지점(虧者盈之漸) 비어 있으면 점점 차게 되어 있다.
손어기즉영어피(損於己卽盈於彼) 내가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 각득심정지반(各得心情之半) 그러면 각각 심정의 절반씩을 얻는 것이다. 이득아심안즉평(而得我心安卽平)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얻게 되니, 차안복즉재시의(且安福卽在時矣) 이 어찌 바로 복 받을 때가 아니겠는가.” 흘휴시복의 해석이다.
‘모든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오고 모든 재앙은 입으로부터 나온다(病從口入禍從出口)’고 했다. 말을 조심하라 이야기다. 그래서 생각은 자유분망(自由奔忙)하게 하되 표현(表現)은 삼가라고 하는 것이다. 화에 대한 경구(警句)는 이어진다.
당(唐)의 풍도(馮道)는 ‘입은 재앙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처신하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安身處處年)’라며 말을 신중히 할 것을 경계(警戒)했다. 남의 허물을 들추지 말고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형국(形局)은 아닌지 늘 자신의 처신(處身)을 되돌아봐야 한다.
남을 헐뜯기 전에 자신이 덕(德)을 쌓아야 한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했다.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말이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다. 동성상응(同聲相應) 동기상구(同氣相求)라는 말도 있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기질이 같은 사람은 서로 찾는다는 뜻이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에도 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군자는 敬으로써 안(마음)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바깥(일)을 바르게 한다. 敬과 義가 확립되어 德을 이루니 외롭지 않다”라고 해서 역시 덕불고(德不孤)를 말하고 있다. 덕이란 베푸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덕은 베풀 때 빛나는 것이다. 남을 헐뜯기 전에 덕을 쌓아야 하는 이유이다.
밀고 밀리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화(禍)를 당하지 않은 집이 있었다. 지리산 자락의 모든 집이 불탔어도 그 집만은 비껴갔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베풀었기 때문이다.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덕을 쌓은 집은 이념(理念)도 사상(思想)도 다 비껴갔던 것이다.
완장 찬 사람들에게 붙들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층 방에서 심문을 하던 사람이 심문은 하지 않고 뒤돌아 앉아 신문만 보고 있더란다. 한참을 있어도 말 한 마디 묻지 않고 그대로 있더란다. ‘아! 나보고 도망치라는 말이구나!’ 그 순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면서 도망쳐 살았다고 한다. 왜 도망치게 내버려 뒀을까?
복을 빌지 말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 반대급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그것이 뽐내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광이불요(光而不燿)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는다. 반듯하고 청렴한 것은 좋지만 그로 인해 남을 해치거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 곧음은 자칫 교만을 부른다. 받는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말도 마찬가지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화복(禍福)을 말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