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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유응부와 세조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9월 22일
 
↑↑ 이희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운영위원장
ⓒ (주)포천신문사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승하하니 그의 아들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전통적으로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왕실의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하지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고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지만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황보 인·김종서 등과 같은 고명대신(顧命大臣)에게 넘어갔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에게는 문종 외에도 수양(首陽)·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응(永膺)의 일곱 명의 적자(嫡子) 대군이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 신하에게 넘어갔던 당시에는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상황이었기에 능력 있는 여러 명의 대군들은 자연스럽게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은 성격도 서로 달랐지만 경쟁관계에 있었다. 먼저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정치보다는 문학·예술을 좋아하여 문객과의 왕래가 잦았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정치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단종 초 고명대신이었던 황보 인은 성격이 유약하였으며, 남지는 신병으로 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모든 실권은 자연 김종서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에 대하여 『단종실록』은 이들 대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해 궁중에까지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黃標政事)라 불릴 정도로 자제를 포함, 많은 당여(黨與)를 요직에 배열해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는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도 제2의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우며,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황보 인·김종서 등이 반드시 안평대군과 모의해 종사를 망가뜨렸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니 그의 야망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고명대신들은 야심을 품고 붕당을 조성하려 하지 않았고 단종을 충의로 보필하여했다는 것이 객관적인 자료에서도 인지되고 있다. 하지만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의 임무를 넘어서서 월권을 행사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시 사관(史官)의 기록에 의하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평할 정도로 왕권을 추락해 있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시기는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년(단종 즉위) 7월경에 권람에게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진심을 말하고,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홍윤성(洪允成)·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 1453년 10월 10일 밤, 마침내 유숙(柳淑)·양정·어을운(於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쓰러뜨렸고, 황보 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密召)하여 궁문에서 퇴살(推殺)하였다.

이렇게 무단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숙청한 후에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고, 2년 뒤에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수 있었다.

한편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 등을 왕의 옆에서 칼을 차고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劒)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때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면서 뒷날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러자 유응부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하늘이 준 기회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했으니, 성삼문을 비롯한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이때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유응부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그대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에게 고발당했으니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였다.

당당한 유응부의 태도에 화가 난 세조는 달군 쇠를 가져와 유응부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나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유응부는 비록 집은 가난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으며,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고기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고 한다.

충신 유응부는 포천 출신으로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일찍이 무과에 올라 첨지중추원사,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의주목사를 거쳐 끝내는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공교롭게도 왕위를 강제로 찬탈한 세조의 묘인 광릉과 충신 유응부의 충목단은 죽엽산을 경계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다. 하지만 목숨으로 의를 실천한 유응부의 유적은 왕릉으로 보호받고 있는 세조의 묘에 비하여 더없이 초라하니 씁쓸한 마음 머물 곳이 없다.

이희용 / 철학박사, 경북중학교운영위원장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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