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6-10-23 오전 10:54:12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칼럼종합

[이희용 칼럼] 의(義)를 실천한 이서구(李書九)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9월 08일
 
↑↑ 이희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운영위원장
ⓒ (주)포천신문사 
조선 후기 문신인 척재 이서구(惕齋 李書九, 1754~1825)가 말년에 은거했다는 곳이 포천의 영중면 양문으로 이른바 양문대신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실학자인 사가시인(四家詩人) 중 유일하게 서자가 아닌 적출이고 관직이 우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서구는 역사적으로 세도정치를 일삼던 안동김씨 정권에 부합하지 않았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고 척족을 물리친다는 우현좌척(右賢左戚)의 원칙을 지켰으며, 세상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래서 생전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에 의해 13년 동안 방폐되었으며, 사후에도 25년 동안이나 추탈관작의 위험에 놓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올바른 행실이 기록으로 이어져 그가 선정을 베풀었던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설화로 형성되어 전승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은거지인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그의 실제적인 기록보다는 치적이나 인품과 관련한 설화가 주로 전승되고 있다. 이서구 설화의 내용에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인물로 묘사되어 예언가나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이인(異人)이나 구원자로 형상화 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낙서(洛瑞)이며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이었다. 부친은 의정부영의정을 증직 받은 원(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이 된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이서구는 1758년 나이 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기에 외할머니 곁에서 자랐으며 외숙(外叔)으로부터 당나라의 시와 『사기』·『통감』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했고, 16세부터는 문장가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21세 되던 1774년 영조 50년 가을에 정시(庭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고, 10월에 섭기주(攝記注)로 첫 벼슬을 받았다. 22세 때부터는 약 6년간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어 특별히 역사책을 깊이 공부했다. 1785년 정조 9년에 시강원사서, 1786년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그는 한자의 구조와 의미를 연구하는 데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에 쓰이는 전고(典故) 또한 널리 알고 있었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하지만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은 일생동안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으며 또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 그리고 벼슬을 한 일을 평생의 애석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실학파 문인들과 사귀었고, 그들과 함께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며 당시 나라의 정세에 대해 토론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독창성, 현실문제, 조선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관심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이서구의 시는 그의 개인적 성향관계로 혁신적이거나 현실에만 치우치기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인정이 두텁고 더불어 사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고귀한 내면의 깊이를 아울러 그려냄으로써 시의 격조를 높이는 데 힘썼다.

그의 “수표교” 라는 시에 내용이다. “도회인들 대보름 밤 답교놀이 하는 곳은, 운종가의 최고다리 수표교가 있을 뿐, 달 높이 뜨고 사람들 흩어지길 기다렸다가, 이곳에 홀로 와서 기분 좋게 거닌다네.” 여기서 느끼듯이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소(遺疏)에는 간절함이 있었는데,『순조실록』 27권, 25년(1825 을유유) 10월 2일(을묘) 2번째 기사에는 이서구가 세상을 떠나며 올린 글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이 깃들어 있었다.

“판중추부사 이서구(李書九)가 졸하였다. 유소(遺疏)에 이르기를, 신은 구마(狗馬)와 같은 천한 질병으로 여러 달 동안 고생하여 실낱같이 남은 목숨이 조석 사이에 끊어지려 합니다. … 감히 죽음에 임해 상소하는 것을 본받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지(聖志)를 분발하시어 도모해 다스리기에 힘쓰시고, 어진 선비를 널리 뽑아 저궁(儲宮)을 보도(輔導)하며, 먼저 궁부(宮府)를 바로잡아 재용(財用)을 절약해서 민력(民力)을 아껴 양성하고, 멀고 가까운 곳을 같이 보아, 준재(俊才)를 모아서 인심을 매어두소서. … 신은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막혀 말을 이루지 못하고 종이에 임하여 눈물만 흘리면서 애련(哀戀)해 함을 금하지 못하고 삼가 소(疏)를 남겨 아룁니다.”

이에 순조임금은 이서구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이렇게 전교한다.
“…유소(遺疏)를 보건대, 우국 애민(憂國愛民)의 정성이 죽음에 임해서 더욱 간절했으니, 감탄하고 슬퍼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졸한 판부사 이서구의 성복일(成服日)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조부(弔賻) 등의 절차를 예에 의해 거행할 것이며, 녹봉(祿俸)은 3년을 한정하여 실어 보내고, 그 아들은 복제(服制) 벗기를 기다려서 조용하라” 하였다.

격동의 시기에 역사를 바로알고 척족의 불의한 정치적 만행과 대응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하려 한 평생을 바쳐 죽는 날까지 간절한 진심을 상소했던 충신이 이서구, 그가 어머니 품같이 편안히 쉬려했던 고장이 포천이었으니, 이제라도 그의 업적과 기록을 잘 정리하여 설화나 전설이 아닌 기록으로 교육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순조실록』『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산초집(薑山初集)』,『척재집』,『조선조후기 한시연구』

이희용 / 철학박사, 경북중학교운영위원장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9월 08일
- Copyrights ⓒ포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
이름 비밀번호
개일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겨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PBS 포천방송 TV
경기도
생활상식
가장 많이 본 뉴스
정보 커뮤니티
상호: 포천신문 / 주소: 경기 포천시 해룡로 130-38 (동교동)
발행인·편집인 : 김현영, 편집인 강신옥 / mail: ipcs21@hanmail.net / Tel: 031-542-1506~7 / Fax : 031-542-111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 아50080 / 등록일 : 2009년 6월 22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현영
Copyright ⓒ 포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