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6-10-16 오후 09:10:57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특별기고

[특별기고=이석구] 세종과 포천 2편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5년 08월 26일
 
↑↑ 이석구 전 포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전 초등학교장
ⓒ (주)포천신문사 
<밝혀지지 않은 지명>

임금의 행차에는 언관(言官) 서너 명이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임금의 뒤를 따르며 그 날의 임금의 일과를 기록해 두었다가 환궁 했을 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에게 보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된 지명(地名)이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실록에는 포천현이나 영평현 왕방산(王方山)이나 해룡산(海龍山)등은 지금도 알려진 지명대로 남아 있으나 세종이 숙식(宿食)을 했다고 기록된 영평현의 굴동(掘洞)이나 포천현의 매장원(每場院)이란 지명이 실록에 각각 22회, 25회나 나오지만 지금의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다.

포천의 지을동(知乙洞), 하교(下校), 유전(柚田,) 송원(松園) 등의 지명도 세종이 머물렀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이 지명이 없다. 천명, 또는 이천 명이나 되는 군사가 사냥도 하고 숙식도 하면서 강무를 하려면 커다란 막사나 강무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지명뿐만 아니라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추측컨대 군사훈련 지역을 대외비(對外秘)로 일반인이 모르게 행하여 졌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실록에 나오는 지명은 거의가 한자(漢字) 지명으로 되어 있고 일반 사회에서 쓰이는 지명은 거의가 순 우리말 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혀 다르게, 모르게 사용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성계 방원과 포천>

세종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부터 포천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언제부터 얼마동안을 살았는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성계가 요동 땅을 지키던 장수시절 요동 정벌에 나가 있는 사이 나라의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들은 태종(방원)은 서울에 있으면서 사제(私弟)에 들어가지 않고 곧 말을 달려 포천으로 와서 어머니(신의왕후)와 계비 신덕왕후와 이복동생 (방번, 방석)을 말에 태워 동북 면으로 7일 동안 피신시켰다가 일이 안정된 것을 알고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 이성계의 비(妃)와 빈(嬪)이 모두 포천에 거주하였으며 신의왕후는 포천의 재벽동(滓璧洞)의 전장(田莊)에서 살았고 신정왕후는 포천의 철현(鐵峴)의 전장에서 살았다고 명확히 되어 있으나 현재 이 지역 이름도 찾을 수가 없다.

포천의 지명유래에는 궁말, 용상골, 부인터가 옛 지명으로 전래되고 있다.궁말은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씨(康氏)가 머물렀다고 하여 전해지고 용상골(龍床)은 이성계가 잠을 자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고 부인터(婦人)는 이성계가 다닐 때 따라다녔다는 궁녀 등 여자들이 머무른 곳으로 오늘 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설화나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석구 / 전 포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전 초등학교장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5년 08월 26일
- Copyrights ⓒ포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
이름 비밀번호
개일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겨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PBS 포천방송 TV
경기도
생활상식
가장 많이 본 뉴스
정보 커뮤니티
상호: 포천신문 / 주소: 경기 포천시 해룡로 130-38 (동교동)
발행인·편집인 : 김현영, 편집인 강신옥 / mail: ipcs21@hanmail.net / Tel: 031-542-1506~7 / Fax : 031-542-111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 아50080 / 등록일 : 2009년 6월 22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현영
Copyright ⓒ 포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