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랴 잊을쏘냐 해방의 이날 삼천만 가슴마다 넘치는 기쁨 누구나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이보다 더 기쁜 날 다가오도록(1945년 해방된 지 10일 만에 시민 단체에서 초·중·고교에 보급한 ‘해방의 노래’)
이보다 더 기쁜날 독립의 날 이라했다.
1.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건너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2. 한숨아 너 가거라 너와도 하직 서름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 나거라 아득한 시베리야 넓은 벌판에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서울에 있는 애국시민단체에서 보급한 ‘해방가’로, 1945년 9월 1일부터 1947년까지 불러진 노래인데 작사자가 북한 좌경 작가여서 보급이 중지되었다.
1948년까지 우리는 목이 터져라 해방가를 불렀다. 1945년 8월 14일 라디오 방송에서는 내일 8월 15일 일본 ‘소화’임금의 중대 방송이 12시(정오)에 있을 것이라는 예고 방송을 시간마다 내보냈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해했으나 8월 15일(정오) ‘쇼와덴노(쇼와 천왕)’의 중대 방송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8월 15일 12시(정오) 라디오 방송을 들은 포천 사람들은 네거리 김인봉 씨 댁 앞에서 농악대를 앞세우고 춤을 추고 농악놀이를 하였으며 언제 만들었는지 태극기를 손에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밤 12시까지 만세를 부르던 포천 장거리(신읍) 사람들은 준공된 지 7일 밖에 안 된 진자(신사, 일본 신을 모신 사당 지금의 천주교회 자리에 있었음)에다 불을 지르고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튿날 영북초등학교 일본 교장이 자기가 살던 집에다 불을 지르고 그 불속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가 하면, 가산면장 윤모 씨 댁은 면민들에 의해 기둥이 톱으로 잘리고 일본 공무원들은 허둥대며 인천으로 도망을 가고 청년훈련소 ‘다까하라’ 교관은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몸져 누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치안대장으로 문상규(간이학교 교장) 씨가 취임하여 임시 경찰서장이 되고 홍공의가 후생 과장이 되어 미 군정의 지시를 받았다. 미육군 군정관 중의가 군수대행 고문관으로 행정을 맡고 일제시 군수를 지낸 서장석 씨가 포천면장이 되고, 일본 학교에는 ‘대한독립촉성회(중앙회장 이승만 박사)’ 간판이 내걸리고 문진교 씨가 포천 지부장이 되고, ‘한독당(중앙당수 김구 주석)’ 포천지부는 이동백 씨가 맡아 군 행정을 도왔다.
치안 행정 위원으로 감리교회 고명균 목사와 몇몇 유지들이 면장(임시)을 옹립하는 등 포천군 살림이 시작되었다. 남과 북은 1947년까지 38선을 경계로 자유로이 혹은 검문을 받고 오고가며 무역을 하면서 살았는데 보병 제1연대가 주둔하기까지 미군 24사단이 내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금년부터 포천 합창단으로 하여금 ‘광복절’ 노래에 이어 ‘해방의 노래’를 경축식 석상에서 소리 높여 불렀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오늘이다. 나는 혼자라도 ‘해방가’를 부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