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으로부터 포천성당 신평 공소 신축에 쓰일 십자가를 제작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말씀이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난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는 여전히 신에 대한 의심과 궁금한 게 많은 초보신자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던 신부님과 수녀님께 직설적으로 말하고 질문하는 당돌한 신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신부님의 제의를 덜컥 수락을 하고나니 십자가의 의미를 어떻게 전달을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느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의미와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부활이란 단어가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맴돌며 복잡해졌다. 고민은 의외에 쉽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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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하느님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십자가를 두고 하느님께 질문을 드리기 시작했다. 3주에 걸친 십자가 제작은 이렇듯 하느님과 나의 어설픈 대화를 통해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가 있겠으나 조각가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그 자체로 완벽한 조형성을 가진 형태이다. 단순함과 절제된 형태와 좌우대칭이 주는 간결함은 강력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전달한다.
좌우대칭과 비례감을 적절히 사용하면 멋있는 형태가 나오는 만들기도 쉬운 형태로서 고민할게 없어 보이지만 튀어야 하는 예술가(?)에게는 오히려 쉽지 않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예술가는 항상 변화해야하며 새롭고 강력한 이미지를 통해 말해야한다고 믿고 살아온 나에게 평범한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십자가를 만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내가 만든 십자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의무를 예술가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주님께서는 어떤 십자가를 만들라고 내게 임무를 주신 것일까? 먼저 십자가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했다.
“나무에 매달려 죽임당한 자는 저주받은 자로 간주했던 유대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저주의 상징이었다(신 21:23; 갈 3:13).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으며, 십자가의 극한 고통과 수치를 몸소 겪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죽음의 멸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평소에 궁금했던 것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것은 부활이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날 수 있을까 하는 인간적인 예수에 대한 질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부활은 그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특징이다.
하느님께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던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르다는 라자로가 죽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예수님의 물음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고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순종하였다. 이 성경구절을 읽는 순간 내 마음을 스친 건 “나는 순종하고 있는가?”였다. 그리고 순종할 수 있겠는 가였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믿음에 보답하셔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내셨고 당신 자신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당신이 직접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 인간을 대신해 멸망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다시 살아나셔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예언을 스스로 증거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육신 또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부활을 통해 확증 된 것이다. 부활을 통해 본 십자가는 예수님과 기독교의 모든 것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편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