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편견(偏見)과 편법(便法)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편견이란 공정(公正)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편법은 정해진 절차(節次)나 과정(過程)을 무시하고 오로지 간편하고 쉬운 방법만 취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 편견이나 편법은 정도(正道)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옳고 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너뛰고 생략(省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견이나 편법을 금기시(禁忌視)한다. 꺼리고 피한다. 싫어한다. 정당(正當)하지 않기 때문이다. 떳떳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들통 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편견에 상응하는 말로 사시(斜視)라는 것이 있다. 사시란 근육(筋肉)의 이상으로 한쪽 눈의 시선은 어떤 목표를 향하고 있는데 다른 쪽 눈의 시선은 딴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타고 난 사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사시의 시선(視線)으로 세상을 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곡(歪曲)되기 때문이다. 삐뚤어지기 때문이다. 편견에 물들기 때문이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안 된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온통 물들어 보인다. 이래서는 안 된다. 실체를 바로 봐야 한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그래야 정확히 판단(判斷)할 수 있고 대책(對策)을 세울 수 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에 편법을 쓰지 않는 정직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 이야기다. 공자가 자유에게 ‘네 수하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느냐?’고 물었다.
자유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길을 갈 때 지름길로 가지 않습니다[行不由徑]’라고 대답했다. 편법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야할 길이 멀고 돌아가게 되면 지름길을 택한다. 그런데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은 지름길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담대멸명은 일을 할 때 작은 이익을 위해 약삭빠르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도(正道)와 상반되는 말 가운데 사기(詐欺)라는 말이 있다. 詐는 말씀의 뜻인 言과 짓다의 뜻인 사(乍)가 더해진 글자로 작위가 있는 말 즉 ‘속이다’라는 뜻이다. 欺는 하품의 뜻인 欠(흠)과 其(기)가 더해진 글자로 역시 ‘속이다’의 뜻이다.
사기는 목적을 위해 남을 나쁜 꾀로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법률적 의미로는 고의(故意)로 사실을 속여 사람을 착오(錯誤)에 빠지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한 마디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천 마디의 말도 쓸모가 없다[一言不中 千語無用]’고 했다. 맞는 말이다. 정도를 가지 않고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警戒)해야 하는 이유이다.
옛 사람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을 경계했다. 사문난적은 ‘글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란 뜻이다. 여기서 문(文)은 단순히 글자나 문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도(道)가 드러난 예악(禮樂)과 제도(制度)를 가리킨 것이다.
바로 유교(儒敎)의 이념 아래 계승된 경험의 총화(總和)를 말하는 것이다. 사문(斯文)은 공자가 광(匡)땅에서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을 때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광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匡人其如何]’에서 유래했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펼쳤고 유교 이념과 배치(背馳)되는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문난적으로 몰아 배척(背脊)했다.
오늘은 어떠한가? 편견과 편법은 일상사(日常事)요, 사소(些少)한 일이라고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지? 송(宋)의 유학자 구양수(歐陽脩)는 ‘재앙과 근심은 늘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쌓인다[禍患常積於忽微]’고 했다.
사소하게 여겼던 것이 쌓여서 재앙과 근심이 된다는 말이다. 아름드리나무도 털끝만 한 작은 싹에서 자라고 9층의 높은 누각(樓閣)도 한 줌의 흙에서 시작하니 사소하다고 하찮게 볼 일이 아니다. 편견과 편법을 화두(話頭)로 뽑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