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때가 되어 한가롭게 이발소 문을 열고 불편하던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가면 나는 드디어 가위를 손에 쥐고 다시 이발을 하기 시작했다. 기계를 청소하고 있는데 흰머리에 초라한 노인이 문을 열고 “이발하나요?”하면서 나의 이발소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를 마치고 가위를 들고나니 그 노인은 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나는 사람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얼굴만 보아도 대략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옆머리를 치면서 말했다.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꿈 하면 혼과 백이 있는데, 혼은 ‘영’, 백은 ‘육신’을 뜻하고 꿈이란 백이 수면 상태에 있고 영이 활동하는 것을 말하며, 백에서 혼이 떠나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꿈을 쉽게 풀이하면 정반대이고 누구나 보통 돼지꿈을 좋아하지만 돼지꿈도 꿈에 따라 검정 돼지가 무리를 지어 집으로 몰려오는 꿈이라야 좋은 꿈인 것이다. 돼지가 사람을 물어 피가 나면 악몽이고 꿈에 똥이 나오면 돈이 생기고, 죽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흉몽이니 꿈에 조상을 보게 되면 조심해야 한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놓았다.
나는 노인에게 “어르신 혹시 역학을 공부하셨나요?”라고 물어보았다. 노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생니가 부러지는 꿈을 꾸면 조심해야 한다.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꿈과 하늘을 나는 꿈은 키가 크는 꿈이고, 꿈에 맑은 물을 보는 것은 길운, 꿈에 황토물을 보는 것은 흉몽이다. 꿈에 임금, 대통령을 보면 운이 좋은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벌써 윗머리를 정리하면서 나의 병수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아내 생각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가위질을 멈추었다. 온갖 병치래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일으켜 세운 마음 착한 사람이 별안간 쓰러졌을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아내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고, 마음을 놓기도 전에 싸늘하게 온기를 거두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보겠다고 막일을 하며 애를 쓰던 아들이 달려와 엉엉 울던 모습이 생니가 부러지는 꿈을 조심해야 한다는 노인의 말에서 겹쳐 보였다.
겨울이 다가오던 계절에 나는 아내의 상여가 떠나가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 못난 남편을 버리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산소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떠나지 않고, 이발로 어려운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던 그 약속의 실천을 위해서 힘을 내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여보 이발사가 왜 가위질은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는 거요?” 정신을 차려보니 노인은 나를 바라보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다 되어갑니다.”
다시 이발을 마무리하던 중에도 노인은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을 것이야. 그때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렀는데, 우리 마을에 복자라는 처자가 혼례를 마치고 지인들이 신랑을 다룬다 하여 거꾸로 매달아 놓고서 빨래 방망이로 발바닥을 때렸지. 지나가던 미군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그 집에 들어가서는 영어로 ‘이 사람 빨갱이냐’고 물어보았다지 뭔가? 영어라고는 오케이와 땡큐 밖에는 몰랐던 사람들이 오케이라고 웃으면서 말하자 그 미군은 매달렸던 신랑을 총으로 쏴서 죽였지··· 우리 조상들은 결혼하는 신랑의 발바닥을 때려 정력을 촉진시켰는데···”
노인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이발도 마무리가 되었다.
죽은 아내의 무덤에서 약속했던 봉사는 이제 나에게 생활이 되었다. 몇 해 전인가 땀이 많이 흘러내리는 더운 여름이었다. 산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산과 들에는 새소리가 들려오던 어느 날 ‘석가탄신기념일 특집 방송’으로 방송국에서 미스코리아 몇 분이 포천 산정호수를 방문하여 봉사를 하기에 나도 참석했다.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며 생활을 하는 1, 2급 되는 포천 장애인 50여 명이 선정되어 산정호수에서 놀이기구도 타고 즐거운 야외활동을 하는 동안 나도 절룩절룩하면서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때 다리를 저름 거리는 아이가 서울 잠실야구장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주최 측에 말했다.
주최 측은 어린이의 소원이니 다음 주 일요일에 야구장에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나도 그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요일에 야구장에 갈 수 있었고, 동심으로 돌아가 소리를 지르고 홈런에는 손뼉을 치면서 기쁘고 즐거운 하루를 감사히 보냈다.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장애인 작업장을 찾아가서 그들과 대화도 나누고 웃기도 하면서 마음을 나누어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리에 사는 장애인 정 씨가 엔진이 달린 휠체어를 타고 나의 업소를 방문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한 여인이 김치를 담아 정성스럽게 가지고 와서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어색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지인이던 김영환 회장에게 나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느덧 2013년 연말이 되었다. 동전을 모아서 몇 만 원을 만들었다. 이발봉사를 기다리는 장애우들을 찾아갔다. 연말이라고 해도 외부인사들이 시설을 찾아가 격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이발로 여러분을 돕고 있으나 가난하여 짜장면 한 그릇씩 시켜 줄 돈 밖에 없으니 작지만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살면 반드시 큰 축복과 영광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말로 송년 인사를 했다. 모두 손뼉을 치면서 마음을 나누었다
집에 돌아와 서투른 글을 하나 지었다.
장애인
장애인 세상은 온통 장애인 여보시오. 사람 네들 장애인이라 비웃지 마시오. 나는 육신이 장애이지만 마음은 장애가 아니오. 몸의 장애는 회복될 수도 있지만 마음의 장애는 회복이 힘듭니다. 우리네 모두는 예비 장애인 장애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소. 세상 살다보니 이렇게 되었소. 누구나 하나씩은 장애가 있으니 그들을 비웃지 말고 진솔하게 마음을 나누시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