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청원(請願)과 청탁(請託)이란 말이 있다. 청원과 청탁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분분하다. 청원이나 청탁이나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쓰임은 다르다. 청원은 대(大)를 전제(前提)로 하는 것이고 청탁은 소(小)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청원은 공익(公益)을 앞세우는 것이고 청탁은 사익(私益)을 앞세우는 것이다.
국민이 문서(文書)로 희망사항을 국가 기관이나 지방 자치단체에 진술(陳述) 하면 바로 청원이다. 반면 수필 원고(原稿)를 써달라거나 취직(就職) 시켜 달라거나 뇌물(賂物)을 주고 도와달라거나 하면 청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청원과 청탁은 상존(常存) 해 왔다. 늘 있어 왔다. 개인 간에 오고 가는 부탁은 일상사(日常事)이기 때문이다. 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 상부상조(相扶相助)의 필요성 때문이다. 독불장군(獨不將軍)처럼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영위(營爲)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혼자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사(人間事)에서 만능은 없기 때문이다. 졸(卒)이 있어 장수(將帥)가 있는 것이고 백성(百姓)이 있어 군주(君主)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원과 청탁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의 관계에 있는 지도 모른다.
원(願)은 뜻을 세우는 것이다. 큰 뜻을 세우는 것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이 아니라 원대(遠大) 한 큰 꿈을 설계하는 것이다. 눈앞에 닥친 개인사(個人事)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大衆)과 나라를 위한 큰일에 뜻을 두는 것이다. 대업(大業)에 뜻을 두는 것이다. 소망(所望)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원(所願)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마이나(mina)가 아니라 메저(major)로 넘어가는 것이다. 소원은 소망의 극대화(極大化)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망이 단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인데 비해 소원은 장기적이고 단체적(團體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되풀이하고 반추(反芻) 하는 것이다.
청원은 하되 청탁은 삼가야 한다. 아니 근절(根絶) 되어야 한다. 청원이란 말엔 상부상조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나 청탁은 아니다. 청탁이란 말엔 부정(不正)의 뜻이 숨어 있다. 부패(腐敗)의 사슬이 얽혀 있다. 그래서 청원은 떳떳하게 행해지나 청탁은 은밀히 행해진다. 뒤가 구리기 때문이다. 뒤가 켕기기 때문이다.
뒤가 구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켕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공직(公職)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회 각층에서 리더급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해야 한다. 아무리 금전만능(金錢萬能)의 시대라 하나 청탁과 뇌물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대가성이 없었다고 변명한다고 해서 사면(赦免)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청탁하면 떠오르는 것이 로비라는 말과 김영란법이다. 김영란법은 부정부패를 없애자는 것이다. 이 땅에서 부정부패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는가? 배가 산으로 가지 않았는가? 언론(言論)이 밉다고 공직과 묶어 규제(規制) 하는 것은 잘못이다. 언론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자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는 로비 양성 화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김영란법이 부정부패 추방을 위한 획기적인 장치이기는 하나 정상적 청원까지 위축시킬 우려가 있기에 하는 말이다.
탁(託)은 의뢰(依賴) 하는 것이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원(願)이 스스로 세우는 것이라면 탁은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세워야 한다. 스스로 능력을 쌓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정당(正當) 하게 행사해야 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니 자연 뇌물을 주게 되는 것이고 권력의 힘을 빌리게 되는 것이다. 받는 자나 주는 자나 모두 자성(自省) 해야 한다. ‘내가 알고 네가 알고 하늘이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