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산에 들어와 이발을 시작한 날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지금도 온전치 못한 손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들을 떠올린다. 인생을 여행이라고 하는데 나는 너무도 힘든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가족을 모두 다 보내고 살아남은 피곤한 몸에도 뇌병변 3급에 지체 2급이라는 장애 꼬리표를 달고 멀리 보이는 하늘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러나 모진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언제부터인지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 좋아졌고 늘 가슴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뛴다. 그래서 혼자 남은 여생은 남을 생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봉사라는 이름으로 고민하였고, 무심코 시작한 것이 아이들과 학생들의 등교 도우미 일이었다. 생각하면 가끔 손자나 손녀 같은 아이들이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는 일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 잠을 이루지 못한 기억이 있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대할 때면 아들에게 어릴 적에 따뜻하게 손을 잡고 더 많이 걸어가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른 아침 그날은 비가 억수 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어떤 아이는 엄마가 우산을 들고 같이 오는가하면 비를 그대로 다 맞으면서 걸어가는 모습도 모였다. 비를 맞고 힘없이 가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왠지 마음이 아팠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화창한 가을에 생기가 넘치는 초등학교 아이가 빙그레 목례를 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였고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 졌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나는 계속해서 학교 앞 교통봉사를 하면서 겨울이 되었다.
입김이 호호 날리는 어느 날 가산초등학교 입구 우체국 앞에서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깃발을 들고 아이들의 등교를 돕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불편한 내 다리는 마비가 되기 시작했고 평소보다 더 힘겨워서 어쩔 수 없이 절름거리는 나의 모습에 이웃 사람들은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불편한 다리로 하루 거름 없이 우체국 앞자리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면서도 유난히 교통안전을 안도하는 봉사는 즐겁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열 살쯤 된 것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향해 뛰어 오면서 “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하고는 친구들 속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 아이에게 “그래 건강하게 공부 잘해라”하고 답하였다. 아이들의 총명한 눈빛과 사랑스런 목소리는 어느덧 얼어서 녹을 줄 모르는 나의 마음을 따뜻함으로 바뀌게 해주었다. 이름이 좋아 봉사이지 아이들을 위한 학교 앞 안전봉사는 오히려 그들의 입김에 나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더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내가 추워보였던지 가끔씩 초등학생 아이가 나에게로 다가와 따뜻한 핫 팩을 손에 쥐어주고 가면서 “고맙습니다”하고는 달려가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 때는 간식을 가져다주고 가는 학생도 있었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가는 아이도 있었다.
11월 어느 날인가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내렸는데 혼자서 횡단보도를 지키며 학생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추워서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을때면 ‘이제 그만 해야 하나? 봉사도 좋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하면서 고민에 빠질때,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가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미소를 보게 되었고,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방학이 올 때까지 나는 길거리 봉사를 쉬지 않았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방학이 되어서야 나는 봉사라는 여행은 천국여행보다 우리를 더 기분좋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그때마다 사랑스러운 가산초등학교와 경북중학교 학생들이 아무일 없이 건강하게 보내고 개학하는 그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1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