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英語)에 히얼(hear)과 리슨(listen)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둘 다 ‘듣는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나 그 쓰임은 다르다. ‘히얼’은 들려오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는 걸 의미하지만 ‘리슨’은 귀 기울여 집중해서 듣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엄마 말은 히얼(hear)하지 말고 리슨(listen)하라고 어른들은 다그친다. 사람이 말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해서 들어야 그 의미가 파악(把握)되고 그래야 그 의미가 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데 건성건성 듣는다면 소리는 들려도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평소에 상대방 말을 건성건성 ‘히얼’하지 말고 집중해서 ‘리슨’해야 하는 이유이다.
‘리슨’한다는 것은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관심(關心)을 가지고 듣는다는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소리가 들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관심이 없으면 실체(實體)가 있어도 눈에 들오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고 듣고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하는 이유이고 매사 경청(傾聽)하고 관찰(觀察)해야 하는 이유이다.
경청한다는 것은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이다. 자기 주장(主張)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것도 건성건성 듣는 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진정성(眞情性)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신뢰(信賴)를 가지고 듣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경청하려면 먼저 하심(下心)해야 한다.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 겸허(謙虛)해야 한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선입견(先入見)을 버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어찌 되겠는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어찌 되겠는가? 세상이 온통 물들어 보일 것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리슨’해야 하는 이유이다. 선입견을 버려야 실상(實狀)을 알게 되고 실체(實體)를 알게 된다. 상대의 말을 듣기도 전에 차단벽을 쳐놓으면 어찌 되겠는가? 제대로 들릴 리가 없다. 편견(偏見)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감정(感情)이 가로 막기 때문이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이란 말이 있다. 딴청을 부린다는 말이다. 나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대화(對話)가 안 된다. 물론 소통(疏通)도 안 된다. 아니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안 된다. 의미공유(意味共有)가 안 된다.
요즘 소통이 문제라고 한다.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리를 맞대고 진지(眞摯)하게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하지 않으니 소통이 안 되는 것이고 정보공유(情報共有)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난무(亂舞)하는 것이고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권위의식(權威意識)을 버려야 한다. 권위는 지키되 권위의식은 버려야 한다. 오소리티(authority)는 지키되 권위의식은 버려야 한다. 오소리티는 부단(不斷)히 노력하여 정상(頂上)을 지키는 것이다. 권위의식은 그게 아니다. 한 때 정상을 지켰으나 지금은 아니다.
과거의 것을 가지고 지금을 재단(裁斷)하려드는 것이다. 과거의 데이터(data)를 가지고 지금을 재량(裁量)하는 것이다. 그래서 뒷북을 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이를 따라잡지 못하니 뒤늦게 설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깨여있어야 한다.
특히 공직(公職)에 있는 사람들은 깨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명감(使命感)을 지녀야 한다. 먼저 공익(公益)을 생각해야 한다. 나를 앞 세워서는 안 된다.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앞 세워서는 안 된다.
나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집안싸움만 해서야 되겠는가? 청빈(淸貧)한 삶을 산 청백리(淸白吏)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사명감에 불타는 장군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히얼(hear)하지 말고 리슨(listen)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