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준장)의 제1연대와 7연대가 38선 사직리·초성리·적성간의 47km에 달하는 넓은 면적을 겸비하고 있었다. (6788명의 병력) 9연대(연대장 유춘근 중령)가 포천 방면, 제1연대가 동두천 방면을 맡았는데 연대장은 함준호 대령이었다.
아군은 북한군에 비해 비교할 수준이 못 되었다. 차량은 중고품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것도 부평 수리창으로 이송 40%에 불과하였고 중화기도 25%가 수리목적으로 반납된 상태였다.
이에 비해 북한군은 제3사단 12000명, 제4사단 12000명, 제105기갑사단(여단)4000명 도합 28000명의 병력으로 전차 156대, 자주포 62문, 122mm 유단포 48문, 곡사포 72문, 45mm 반전차포 96문등 북한 남침 루트배치 초기 병력의 1/3이 포천지역에 집중배치되었으니 당초 개전 초기부터 패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가랑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 속에서 초연이 일기 시작한 불법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아군은 24일 24시를 일기로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장·사병이 외출·외박을 즐기고 육군 본부에서는 장교구락부 준공 축하파티로 장군들이 술에 취해 25일 늦잠을 즐기고 있었다.
4시 30분 포천지역을 전차로 앞세우고 남침을 개시한 것은 적 인민군 제3사단(사단장 소장 이용호), 인민군 제4사단(이권무 소장)과 제1기갑여단이었다. 43번국도를 따라 남침하였다. 28000명의 인민군과 3400명의 한국군의 전투는 시작되었으니 실제는 1개 대대였다.
6·25당시 북한의 남침시 포천 일대는 국군 제2연대 2대대(대대장 전준기 소령)만이 군내면 구읍리에 본부를 두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제7중대(송년환 중위⟶중대장)를 우일선, 제6중대(이인호 대위⟶중대장)를 좌일선으로 하여 각각 43번 국도와 38접경 가양리, 유동리, 영평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4시 30분 일제히 남침하였는데 T34전차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군의 박격포 공격으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동안 포천군인들은 38선 근처에 방공호를 만들고 산병호를 구축하고 남·북 무역을 하였다.(북⟶남으로 북어, 남⟶북 약품) 6·25 당시 10시에 이미 북과군 T34탱크는 읍내에다 3발의 포를 쏘아 3채의 민가가 파괴되었으며 허현씨 형님이 사망하였다.
남으로 내려가 국민방위군에 입대하였던 호병골 정해관 대령, 육사생도 김문한 중령, 이혁룡 부사관, 김태진 대령등은 포천 출신으로 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었다. 공비토벌의공을 세운 유봉렬 소령(방위군)도 당시 향토를 지킨 국민방위군이었다.
독수리 유격대도 9연대(독수리 부대)도 군번 없는 용사로 싸웠다. 산정호수(김일성 별장), 성동교(38휴게소)에 6·25전쟁 기념물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