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나는 6살 이었다. 동네 반장이 "피난 나가세요" 라고 소리치며 다녔던 모습이 생생하고 어린나이에도 ‘또 집안식구 모두 짐을 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또 이런 기억도 있다. 북한치하에서 어린애들을 모아놓고 이러한 노래를 가르쳤고 어린 나도 그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그 가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자욱, 압록강 줄기줄기 피어린자욱"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것뿐이고, 마지막은 김일성장군으로 끝나는 노래였는데 6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후 학교를 다니며 역사를 공부하고 그 당시를 회상해 보면, 몇몇 정치인들의 가벼운 판단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은 죽어야 했었고, 불구자가 되어야 했고, 많은 고통과 재산과 국토의 황폐화를 당해야했다.
그 당시를 회상해 보자. 1950년 3월 말 경 김일성은 부수상겸 외상인 박헌영과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난데서 부터 우리민족의 비극은 탄생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스탈린은 이를 승인했다. 스탈린은 단순한 승인뿐만 아니라 옹진지역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해 주기까지 했다.
1949년 봄에 김일성과 만났을 때에는 전쟁을 반대했던 스탈린이 어째서 1년 만에 마음을 바꾼 것일까, 그것은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가 중요한 여건을 만든 것이다.
1949년 스탈린은 북한군대가 만족 할 만큼 강하지 않으며 주한미군이 남쪽에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전쟁을 반대했었다. 그런데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은 철수했고, 또 다른 이유는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혁명으로 인한 자신감 이였다.
스탈린은 미국 내에서 외부의 일에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 역시 이에 동조했다.
결국 1950년의 전쟁을 허락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한미군 철수 이후 한반도에 미국이 개입 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오판이었다. 1949년 이후 미국은 대외 전략을 수정해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패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개입정책을 세우고 있었다.
1950년 초 미 국무장관 에치슨의 연설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함으로서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에치슨의 선언에서는 방위선 이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통한 개입의 가능성에 대해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화 속에서 주목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박헌영의 언급이다. 박헌영은 남한에 수십만의 공산주의자들이 있으며 전쟁이 시작될 경우 이들이 봉기를 일으켜 동조 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1950년 초까지 남한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이 대부분 숙청되거나 토벌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는 남한에 대한 북한의 또 다른 오판이었다.
최근 유럽 학자들은 스탈린이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한반도에서 실험을 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전쟁중이나 전 후에도 미국의 중요 관심이 유럽에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역시 스탈린의 오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6.25 한국전쟁은 전쟁 발발과정에서 정치지도자들의 판단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정치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은 직접 전쟁으로 즉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온 국민의 몫이 된다. 이 점은 65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