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징비록(懲毖錄)』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한창이다. 원래 '징비'란 말은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문장 "자기징이비후환(子其懲而毖後患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서애 류성룡(柳成龍; 西厓, 1542~1607)이 앞으로는 이른 어려움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물론 서애의 업적도 뛰어나지만, 그 속에서 피 흘리며 나라를 구한 인물로 오성과 한음의 활약도 교훈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외가는 포천시 자작리로 거기서 어릴 적 부모를 따라가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한음은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은 언행과 인연으로 시작되어, 특히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한음 이덕형의 애국은 남달랐기에 오늘날까지도 포천지방의 유림은 그를 추앙하여 지금도 용연서원에서 절사를 봉행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하였으며 학문에도 통달하였다. 특별한 인연으로 포천출신 당대의 대문장이고 조선조를 대표하는 명필이었던 봉래 양사언(楊士彦)선생은 한음의 할머니와 6촌 이었으니 대략 양사언은 왕외가로 한음의 할아버지 항열(行列)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이덕형의 재주를 칭찬하였으며 그와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탁월한 총기를 지닌 어린 한음을 배려하였고, 이항복(李恒福; 白沙, 1556-1618)과 함께 국난극복에 빼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큰선비였다. 얼마나 인연이 대단했으면 사후에도 포천에 있는 용연서원과 화산서원에 근접한 거리에 나란히 배향되어 제를 모시고 있어 그 우애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우리역사상 가장 참담한 외침으로 임진왜란은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으로 7년 동안이나 조선을 피폐하게 만든 최악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조선 최대의 사건으로, 이 때 백성들도 의병으로 일어나 처절하게 맞서 싸웠지만, 지도층이 분열하여 미래 대비할 기회를 잃어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일컬어 당쟁으로 인해 나라를 망하게 한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역사로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편향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과 식민사관에 매몰된 학자들의 음모라는 말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수많은 외세 침략을 이겨냈고 그중에 단연 돋보이는 외교적 담판은 바로 고려 성종 12년 서희가 거란군 80만을 세치 혀로 물리쳤다는 사건이다. 처음에 거란 장수 소손녕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라며 고려의 겁박하자 조정은 땅을 내어주더라도 전쟁을 막자는 주장으로 답답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서희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틈을 잘 엿보아 움직이는데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강하게 답하며 거란을 압박했다. 이때 송나라와 극한 대립각을 세우던 거란의 상황을 미리 인지하여 강동 6주의 땅을 되찾고 대량의 선물까지 받아내며 싸우지 않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외교적 담판 능력은 지금도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문화와 경제력이 융성하여도 국제적인 정보와 힘의 흐름을 올바로 인지하고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른바 이적(夷狄)이라고 칭하는 오랑캐에게도 온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한음 이덕형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안았던 탁월한 학식이 갖추었던 명문가의 후예였고, 경국제세에 정승에 반열에까지 올랐던 인물로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청원사(請援使)로 큰 활약을 하였고, 왜군의 적장과 담대하게 맞서 담판을 하는 의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사가독서란 조선시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로, 세종이 1426년 집현전 학사 중에서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골라 관청의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사가독서의 총인원은 1426년(세종 8)~1773년(영조 49)까지 48차례 320명이었고, 이에 뽑힌 자를 사가문신이라고 불러 최고의 영예로 대접하였다. 이 독서당을 거친 인물만이 대제학(大提學)으로 임명할 수 있게 제도화 하였으니 그 권위가 대단하다고 하겠다.
왜군이 쳐들어온 초기에 한양에선 왕과 신료들이 피난길에 올랐지만, 이덕형은 황망 중에도 거침없이 전장에 나가 적장과 담판을 벌여, 일본은 명나라 정복을 위한 전초기지로 조선을 지나가는 길로 삼고자 양해를 구한다는 가도입국(假道入國)의 의도를 알아냈다. 이에 그는 전쟁의 불가함을 천명하지만 적의 철군이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여, 즉시 왕에게 원병주청을 올렸다.
이에 대해 명은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당시 명의 실세였던 병부상서 석성의 집을 찾아가 사흘 밤낮을 꼼짝도 않고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덕형의 집념과 끈기에 감복한 병부상서는 ‘조선이 무너지면 명도 위태롭다’는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을 내세워 명황제로부터 조선파병의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군에 침략에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백성을 버리고 서둘러 의주로 몽진하여 그 후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던 선조(宣祖)와, 명나라의 원병 참전으로 환도한 후 명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참혹했던 칠년전쟁의 불완전한 휴전을 해야만 했다.
이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부산까지 피난 간 후 미군과 유엔군의 원조와 참전으로 미국이 주체가 되어 체결했던 휴전협정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했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한 상처임을 자각하여, 풍전등화의 난국에서 나라를 구한 이덕형의 애국심을 가슴에 새겨서 스스로의 힘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 희 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 운영위원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 경기도예총 부회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