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문을 나서는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라’ 그리고 ‘자연을 대할 때 겸허하라’ 입버릇처럼 말한다. 겸손(謙遜)과 겸허(謙虛)란 말은 그 뜻이 비슷하나 쓰임은 다르다.
겸손이 사람을 의식(意識)하는 것이라면 겸허는 자연(自然)을 의식하는 것이다. 겸손이 상대(相對)의 파워(power)를 의식하는 것이라면 겸허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의 파워를 의식하는 것이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산지대에서 일어난 대지진(大地震)을 생각해보라. 소리 없이 밀려오는 쓰나미를 생각해보라. 그래서 자연을 외경(畏敬)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겸손이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아는 체하거나 잘난 체하지 않고 삼가 하는 것이다. 겸허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혹여 불경(不敬)스럽지 않은가 걱정하는 것이다. 산역(山役)을 할 때 산제(山祭)를 지내거나 등산(登山)하는 사람들이 연초에 시산제(始山祭)를 지내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이다.
큰일을 앞두고 경망(輕妄)스러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겸손하고 겸허해야 한다. 특히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겸허하게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어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속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이다. 겸양(謙讓)의 미덕(美德)을 발휘해야 한다. 겸손하고 사양(辭讓)할 줄 알아야 한다. 양보(讓步)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남의 의견에 동조(同調)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주장(主張)만 해선 안 된다. 남의 입장에도 서보고 남의 형편도 헤아려보아야 한다.
특히 신념의 포로(捕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념의 포로가 되는 순간 적대감(敵對感)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절감(切感)해야 한다.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신념의 포로가 되어 거리를 휩쓸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매몰되어 국정(國政)을 발목잡고 있는가?
덮어놓고 떠들어대선 안 된다. 덮어놓고 잘난 체해서는 안 된다. 몸을 낮추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두려운 마음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국정(國情)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국제정세(國際情勢)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필부(匹夫)도 아는 일을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몰라서야 되겠는가? 나라가 걱정된다.
나라가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겸허해야 한다. 나라와 국민 앞에 겸허해야 한다. 그리고 자성(自省)해야 한다. 개혁(改革)하라 했는데 개악(改惡)으로 치닫고 있으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옛 어른들은 집을 나가는 자녀에게 “그저 구불구불하여라”고 일렀다. 여기 첫 구불은 사람들 만나면 눈높이를 낮추라는 굴신(屈身)의 구불이요, 뒷 구불은 웃음의 별칭인 구불약(九不藥)의 구불이다. 얼굴에 웃음을 띠면 사라진다는 아홉 가지 부정적 요인이 바로 구불(九不)이다.
구불이란 불안(不安) 불신(不信) 불화(不和) 불손(不遜) 불편(不便) 불초(不肖) 불쾌(不快) 불경(不敬) 불공(不恭)으로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이 구불을 극소화(極小化)해주는 약이라 하여 구불약이라 하는 것이다. 이 모두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고 겸허하라’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희비애로(喜悲哀怒) 감정의 표출을 부덕시(不德視)하던 전통사회에서 웃음은 인격 손상의 요인이었다. 그러나 구불약처럼 그 긍정적인 측면은 은연중에 부추겨져왔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 시집갈 딸 날받이를 하고 나면 시집살이 교육을 시키는데 이때 사반화안(四半和顔) 곧 스마일 짓는 근육 조작법을 가르쳤다.
사반화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하지 않았는가?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높이고 사반화안을 해보라. 겸손한 마음이 절로 우러나고 겸허한 자세가 절로 발현(發現)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