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해방과 6·25전쟁은 내 고향 포천의 지식층의(지성인들의) 좌경 공산주의자들이 날개를 펴고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경 유학생들이나 수도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그리고, 포천에서 양반가의 자손들이 많았으며 인공 치하에서 이용당한 머슴·천민 출신도 있었으니 출신 성분이 다양하였다.
6·25 직전에 놀라운 사실은 북한에서 남파한 ‘파르티쟌(빨치산)’이 왕방산 국가봉 기슭 허모 씨 댁을 근거로 준동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초등학교 교사와 초금 중학교 교감이 남로담원으로 활동하였는가 하면 초등학교 복도에 걸렸던 대한민국 38도 선 남반부 지도가 교사 출신 공산당원들에 의해 6·25직전, 월북하여 북한 공산군의 남침 작전지도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권◯◯ 박◯◯씨는 대학교육을 받은 고급 지식인으로 8·15후 포천의 공산당원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였다.
공산당원으로 첫 희생자는 깊이울 저수지 옆에 살던 허모씨로 남파한 북한 출신 공산당 무장 교육을 답은 빨치산과 대원들, 동생을 은닉시키고 빨치산 근거지를 제공하였다가 체포되어 한국군 보병 제7사단 정보처 파견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총살 사망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군내면 이모씨로 남로당 활동 용의자인 그는 포천경찰서 정보과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선반에서 떨어진 큰 잉크병 몇 개가 머리에 떨어져 두개골과 뇌 파열로 사망한 사건이 있다.
전국의 공산당(남로당)원들이 수백 명 몰려와 이모씨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축석령을 넘어 군내면으로 이어지는 도보 행렬이 5일간 끊이지 않았던 생각이 난다. (구름떼로 몰려와 통곡했다.)
P초등학교 ‘나아가자 동무들아 어깨를 걸고…’ 낙서 사건을 계기로 초등학교 교사 김모, 정모, 함모, 이모씨와 중학교 교감 등이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다 풀려났으나 이들은 6·25가 발발하자 인민공화국군(정규군) 훈련을 받고 참전 북으로 패주(敗走) 하다가 돌아와 전향(轉向)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와 교직에 종사하였다.
또, S초등(국민)학교 인민공화국 국기 게양 사건으로 교장이 직위해제 되었다가 면직되고 구읍리 포목상점 윤모씨의 북한 벽보 부착사건 그리고, 한국군 동향을 살피던 여관 식모로 위장한 여인 간첩 조모씨 체포사건 등이 일어나 포천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괴롭혔다.
6·25가 발발하자, 호병골 출신 이모씨가 일주일 전 북한으로 월북, 공산당 행정교육을 받고 돌아왔다고 자랑하였는데 포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군수급)이 되고 함께 월북했던 한약방 이모씨는 포천군 인민위원회 사무장이 되어 공산당 골수당원 신분으로 3개월간 포천공산당원들을 통솔하고 포천을 다스렸다.
재경 연희전문 교수였던 허모씨는 김일성대학 교수로 초빙되고 사진사 허모씨는 사진작가동맹위원장이 되었는가 하면 구읍 윤모씨는 인민군 고급장교가 됐다.
친일파들의 득세를 미워하고 공산당 이론과 이상세계관에 현혹되었던 포천의 공산당원들 모두가 선비·양반가의 후예들이었으니 지금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포천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