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그 전대의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직책은 사관(史官)이었다. 더 넓게 파악하면 고려·조선시대에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기록하고 발행하는 사관이나 춘추관(春秋館)에 소속된 수찬관(修撰官) 이하의 모든 관원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할 때는 사초의 작성과 실질적인 기록에 전념한 고려시대에는 공봉(供奉)·수찬(修撰)·직관(直館)의 직책이나, 조선시대에는 기사관(記事官)을 겸대한 예문관의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등을 말하기도 하다.
사관은 중국 황제(黃帝) 때에 천자와 신하의 좌우에 위치해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을 기록하는 우사(右史)에서 연원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광종 때에 당나라의 이를 받아들여 궁내에 사관(史館)이라는 관청을 설치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렇게 고려 광종 때에 설치된 관청은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계승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명칭이 개칭되면서 운영되었다. 특히 넒은 의미의 사관인 수찬관 이하는 13번에 걸쳐 바뀌면서, 춘추관의 수찬관·편수관·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으로 정립되고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고려 초기에 설치된 직사관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개변되면서 춘추관의 실무를 관장한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등으로 정립되면서 운영되었다.
고려시대의 사관은 춘추관에 매일 근무하면서 고종 4년까지는 궁중에 입직해서, 의종 11년까지 왕이 하는 말을 기록하였고, 여기서 보고들은 국왕의 말과 국가 전반에 걸친 정사 와 백관의 시비득실을 토대로 견문사와 논평을 곁들인 사초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관내에 보관된 실록과 각종 기록을 보관, 관리하면서, 사고(史庫)에 보관된 자료들을 볕에 말려 습기를 없애는 일을 담당하였다.
하는 일이 이러하니 사관은 한림원(翰林院)과 더불어 가장 존중되고 선망되면서 유학자들이 서로 들어가려고 했었다. 그래서 결원이 생기면 가문이 좋고 문학·문장에 뛰어난 문과 급제자를 엄선하여 상호천거한 뒤 합의를 보아 제수하였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 고려전기에는 이러한 정신이 준수되었으나, 무신집권기에는 당시의 무단적인 분위기와 관련되어 집정자에게 아부·굴종하여 사실을 삭제하고 곡필하였으며, 원나라 간섭기에는 이전의 분위기가 계승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에는 성리학의 수용·보급을 통한 의리·지조의 강조와 함께 직필의 분위기가 진작되기는 했지만, 우왕 스스로 자신의 “과실을 기록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격변기에는 국정이 혼란스러워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사관은 승정원·춘추관에 입직하고 국사가 논의되는 조회(朝會)·조참(朝參)·상참(常參)·윤대(輪對), 경연·중신회의·백관회의·의정부·중추원·육조 등의 대신이나 삼사 관원이 국왕을 면대하는 장소, 국왕의 각종 행차 등에 따라다니며 참석 하였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실록을 편찬하였다. 특히 고려실록은 그 의미와 가치가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에서도 국왕이 죽으면 실록이 편찬되었는데, 춘추관에 임시로 실록청을 개설하고 기록의 주된 인력인 춘추관에 수찬관 이하가 재직시 견문한 정사·인물의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하여 사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수납한 사초(史草)와 춘추관시정기·각사등록(各司謄錄)·조보(朝報)·개인일기·소(疏)·초(草) 및 문집 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여러 변동을 겪고 나서 조선조정은 사관이 기록하는 사초와 춘추관시정기의 질과 양 그리고 직필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정논의·왕과 신하가 면대하는 모든 곳에 사관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장계(狀啓)·하교(下敎)의 내용은 필히 사관이 초록한 후에 육조·대간에게 하달하고, 사초의 말소·누설·개작을 행한 자는 참수형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왕의 사초·실록 열람을 철저히 금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제반 규정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직필을 꺼린 국왕·대신·승지 등의 사관 탄압이 가해져서, 가끔씩 사관의 조참·정청·경연·궐내입시 등이 중지되거나, 직필한 사초를 제출한 일로 화를 입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당쟁과 관련하여 선조·현종·경종실록 때에는 이른바 “수정실록”이라고 기록을 개수하는 과정에서 사관이 탄압받고 직필하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특히 사관은 성종 이후· 유교정치의 진전과 함께 왕·신하·국가의 모든 말과 정치득실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 그리고 비밀사 등을 줄기차게 직필하였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부터 그랬듯이 사관의 객관적인 견해나 간혹 사적인 생각도 포함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최근 조선시대에 한 인물에 대하여 현재의 인물과 비교 발언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해당 문중에서는 사관의 왜곡된 행위와 감정에 의한 기록의 오류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고 마침내 해당 문중에 사과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니 어떠한 외압에도 목숨을 걸고 기록을 지켰던 사관의 정신을 생각한다면, 역사를 주마간산으로 해석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금방 답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을, 나무만보고 숲은 보지 못했다면 더 다듬어야 할 일이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